잠이 들었다. 자유로에 들어선 뒤였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같은 시간, 그 자리, 그 분위기가 아니면 잠들지 못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등을 대면 금방 잠이 드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남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니.
눈을 뜨니 모래밭이 보였고, 바다가 출렁이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십 분 전. 파티마는 없었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발을 벗어 차에 넣고 모래밭으로 내려서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어디 가세요?”
“맨발로 모래밭을 걷고 싶어서요.”
“뒤를 돌아보셔요.”
바로 뒤에 음식점이 있었고 바깥에 놓인 식탁에서 파티마가 손을 흔들었다. 그쪽으로 갔다.
“바지락 칼국수를 시켰어요. 드시고 다녀오셔요.”
아내가 맛있게도 먹던 음식이다. ‘칼국수보다 바지락이 더 많은 것 같아.’ 아내가 그랬다.
“바지락을 정말 많이 넣어주는군요.”
바다를 바라보며 말없이 천천히 먹었다. 아내 때문에 든 습관이다. 미끄러운 국수도 꼭꼭 씹어 먹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많이 드세요.”
누구나 그래야 한다고 다짐하듯이 말했다.
“여길 자주 오셨나요?”
“아내에게는 어싱이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어싱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건강한 사람이면 더욱더. 파티마는 건강해 보였다. 설명을 덧붙였다.
“어싱은 지구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맨발로 바닷가 모래밭을 걷는 게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어요. 한겨울에도 맨발로 모래밭을 걷고는 했지요.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내는 결국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반쯤이나 먹었을까. 둘 다 수저를 놓았다. 파티마가 말했다.
“저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기다릴게요. 선생님은 어싱하고 오셔요.”
바라던 바이긴 했다. 불편할 것이다. 할 말도 없을 테니. 나는 지난날의 그림자를 잡으려 할 것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신경 쓰일 것이고. 그래도 미안했다.
“같이 왔는데......”
“편하게 다녀오셔요. 저도 이게 좋아요.”
썰물이 지고 있었다. 빠지는 물을 끝까지 쫓아갔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검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면서 걸었다.
해가 지고 추위가 몰려들기 시작하면 매고 있던 배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혔다. 그것도 모자라면 내 겉옷을 벗었고. 나는 조금도 춥지 않아. 벌벌 떨면서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이 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날, 병원에서 내 혈압을 재 보았다. 195/130이었다.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일 년 전만 해도 정상이었는데. 며칠 뒤 짬을 내 동네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나더러 거짓말이라고 했다. 정상이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혈압상승은 불가능하다고. 아무튼 강력한 약을 처방해 줄 테니 빠뜨리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 여러 가지 주의사항과 함께.
나는 언제나 괜찮았다. 그래야 했다. 위험할 정도로 혈압이 높다는 건 아무도 몰랐고.
해변을 거닐며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배낭도 매지 않은 내가 낯설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해도 괜찮은 내가.
전에는 어디서든 앉을 수 있는 작은 의자, 깔개, 따뜻한 옷, 따뜻한 물, 약, 손수건, 요깃거리, 물티슈를 챙겨 다녀야 했다. 그것들이 필요할 때 퍼뜩 꺼내기 위해 늘 긴장해야 했고. 이젠 다 끝난 것 같은데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몸은 언제까지 그 기억을 놓아주지 않을까......
날마다 병원에서 칼잠을 자다가 집에 들어갔던 어느 날 넓은 침대에 누워 해방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해방감이라니! 감정은 의무감이나 사명감 같은 것을 무시하고 가끔씩 고개를 내밀곤 했다. 나는 두더지 잡기 하듯 재빨리 그 머리를 망치로 내리쳤고.
파티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잠이 들었다. 집 앞에서 내리는데 파티마가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선생님 또 뵈어요.”
의례적인 인사말이겠지. 그래도 미안하고 당황스러웠다.
“고마웠어요. 다음에는 제가 보답할게요.”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데도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니. 나에게도 그런 배짱이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