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창래 Jul 13. 2019

모든 것을 기억했던 남자

-유령이 사라지면 좋을까? 02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했던 남자는 러시아의 ‘기억술사 mnemonist’, 솔로몬 셰레솁스키Solomon V. Shereshevskii(1886~1958)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러시아의 한 신경심리학자*가 쓴 「기억의 병리학에 대한 매우 문학적인 임상보고 서」가 작은 책으로 출간되면서 알려졌습니다.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아Alexander Romanovich Luria(1902~1977)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본 그대로를 기억하는 이 남자는 젊은 시절 그 놀라운 능력으로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지만 결국 그 놀라운 기억의 희생자가 됩니다.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자 머릿속에는 ‘너무나 많은 기억의 쓰레기 더미’가 쌓여 정리되지 못했고, 마침내 5분 전에 일어난 일과 5년 전에 일어난 사실을 구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지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지 못하는 이 기억술사는 인간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추상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언어학을 다룰 때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인간의 언어는 사실이나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이 글 이 책으로 나온 뒤였다면, 먼저 언어학 부분을 읽고 돌아와도 좋다고 말씀드렸겠군요). 


인간은 실제와 별 관계없이 만들어진 ‘온통 추상적인 언어’로 생각합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유령’에서 예를 들었듯이 인간은 언어를 통해 해석한 세상을 봅니다. 같은 색깔이라도 언어가 다르면 다르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이 남자는 언어를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심각한 곤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용기 위에 이산화탄소가 있는 경우, 압력이 높아지면 이산화탄소는 물에 더 빨리 녹는다.” 

보통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만 이 기억술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이었어요. 

“용기 위에 이산화탄소가 있어, 좋아, 그런데 ‘압력이 높아지면’이라고? 그렇다면 압력이 이산화탄소보다 위에 있다는 말이고 더 무거워진다는 말이겠군, 그런데 점점 위로 올라가면(높아지면) 이산화탄소가 물에 더 빨리 녹는다고?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하단 말이야?”(책 내용을 요약했음)** 


앞에서 예를 든 없음無과 같은 개념도 이 기억술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사진 같은 기억력’을 가졌기 때문에 없음 無을 이해하려면 없음이 있어야 했지요. 그러나 없음無은 어디에도 없어서 ‘사진 같은 기억’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아, '위대한 루리아'라고도 불린다.

*국내에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아,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2007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원래 제목은 『기억술사의 정신 The Mind of a Mnemonist: A Little Book About a Vast Memory 』이고요. 저자는 한국에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지과학의 선구자로 ‘위대한 루리야’라고도 불리는 러시아 신경심리학자입니다.


이런 상황은 숫자를 기억하는 과정에 이르면 우습다 못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굳이 기억할 것도 없는 것을 그는 기억하기 위해 애써야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였지요.

사진 같은 기억력이 아니라 상황을 해석하는(아는 만큼 보는 유령을 가진) 보통사람이라면 위 그림의 가로세로 숫자들이 그저 순서대로일 뿐이라는 것을 금방 압니다. 외울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이 기억술사는 이 숫자판을 ‘사진 같은 기억술’을 통해 기억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지요. 나중에 그는 이 숫자판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는 ‘알파벳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고 해 도 그 의미를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두더지를 한 마리도 잡지 않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