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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Jul 14. 2019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

-일란성 쌍둥이 사진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니체의 말입니다. 웩스켈이라는 생물학자는 같은 개념을 환위와 환계라는 말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고 합시다. 사람과 개는 같은 곳(환위)을 다녀왔지만 각각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목숨을 가진 것들은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제 각각의 인식 도구를 통해 ‘자기만의 세계’(환계)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담은 사진 작품이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일란성 쌍둥이Identical twins>(1966)입니다. 흰 벽을 배경으로 일란성 쌍둥이 여자아이가 서 있어요. 언뜻 보면 의심의 여지없이 꼭 같아 보입니다. 같은 옷을 차려 입었습니다. 머리 밴드까지 꼭 같은 것을 했어요. 


이렇게 극단적으로 같아 보이게 꾸미기까지 했지만 볼수록 달라 보입니다. 한 아이는 살짝 웃고 있는데, 한 아이는 살짝 찡그리고 있군요. 바로 그 얼굴 때문입니다. 사진과 사진에 찍힌 대상은 일란성 쌍둥이 같은 것입니다. 사진은 대상을 그대로 찍어낸 것이지만, 대상 그 자체는 아니지요. 게다가 꼭 같지도 않습니다(사진에 찍힌 모습은 두 번 다시 실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정말 그랬는지는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진이 그런데 글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글은 생각을 찍은(번역한) 것입니다. 그 글은 또다시 생각으로 찍혀서(번역되어) 읽힙니다. 번역에는 언제나 반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각과 그것을 표현한 글은 마치 대상과 그 대상을 찍은 사진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그 글은 생각이 말로, 말에서 글로 번역된 것입니다. 독자는 읽으면서 다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합니다. 늘 세 번의 번역, 세 번의 반역을 통해 전달됩니다. 독서는 그 동안 있었던 수많은 반역들에 대한 반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진실 그 자체를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안다 해도 그대로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애쓴다면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겠지요. 사진가는 진실을 찍기 위해서 긴 시간 동안 대상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진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저도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이 주제와 함께 보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훤씬 더 많은 자료를 보아야 했고, 많은 사람에게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도 다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사진가처럼 두서너 해를 기다렸고 다행히 글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를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다른 점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저는 안개처럼 뿌옇게 느껴지던 인문학이 분명한 그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다시 자료를 뒤져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료를 보게 되고, 다시 깊이 생각하면서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세 유령으로 인문학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강의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들 다 함께 그 한계를 확인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이 인문학 공부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 강의를 듣는 분들은 대개 세 부류인 것 같습니다. 저와 비슷한 관점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될 겁니다. 더 나아가 이 강의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내용들 바탕으로 더 깊고 넓게 깨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강의 내용이 아예 낯선 분들이라면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관심의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관점이 아주 다른 분이라면 강의 내용이 토론과 검증을 시작해 보고 싶은 새로운 제안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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