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몸무게를 재 보았다. 또 일 킬로가 빠졌다. 조금 섭섭했다. 모든 것이 나를 떠나는구나. 날카로운 신경이 재촉해서 서재로 갔다.
잠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파일을 보내는 일 같은 것. 그것도 ‘보내는 일’이라고 힘들었다. 팔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 창문을 모두 열었다. 외투를 하나 껴입고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기분이 조금 나았다.
카페라테를 한 잔 만들어 서재로 왔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고요함에 죽은 듯한 고요함이 더해질 수도 있구나. 파티마가 떠난 이후 그랬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처럼 연인에 대한 이야기 역시 생략할 수밖에 없는 게 많다. 지금은 그때 장면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저 그런 관계였다는 정도로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빈자리를 보면서 깨달았다. 죽은 듯 고요한 서재에서.
겪어보아야 이해하게 되는 말이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없고, 내가 없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라캉이 한 말이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한 시간 정도 잤을까. 혼란스러운 꿈에서 깼다. 속이 쓰렸다. 거울을 보니 볼이 홀쭉하다. 힘을 내려면 뭐든 좀 먹어야 한다. 뭘 먹을까? 부엌 입구에서 한참 서 있다가 오늘치 약만 먹고 서재로 왔다.
일을 하자. 언어학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지.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방식으로. 메모해둔 것을 띄우고 읽었다. 참고해야 할 책을 가져와야 했다. 일어나는데 조금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뭔가 좀 먹는 게 좋겠어. 다시 부엌으로 갔다. 배는 고픈데 먹고 싶지는 않다. 국물에 밥을 조금 말아먹을까. 조금 맵게 만든 국물에.
퍼뜩 짬뽕국물을 만들었다. 이제는 기계적으로 손이 움직인다. 양파 썰고, 대파 썰고, 당근 채 썰고, 양배추 썰고, 고기 좀 썰고, 잘라 냉동시켜둔 오징어 좀 꺼내고. 그러면 준비는 끝난다. 모두 프라이팬에 때려 넣고 기름 적당히 두르고 볶는다. 적당한 때에 양조간장을 넣어 태우듯 섞고, 굴소스도 조금 넣고 쉑쉑하다가 충분히 볶아지면 고춧가루를 좀 치고 곧바로 육수를 붓고 끓인다.
식은 밥 두어 숟갈을 사발에 담고 짬뽕국물에 말았다. 두세 숟갈 뜨고 나니 먹고 싶지가 않았다. ‘맛있다’는 느낌이 슬픈 내 마음을 배신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마음부터 정리해야겠어. 먼저 데이지에게 간단하게 메일을 썼다.
충칭으로 초대해줘서 고맙습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어디에도 가고 싶지가 않아요. 정말 가고 싶은 곳이었어요. 타이밍이 좋지 않을 뿐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좀 주셨으면 좋겠어요.
게이샤에게도 썼다.
우리가 의논할 게 좀 있다는 걸 압니다. 괜찮으면 조금 기다려 주겠어요? 마음 아픈 일이 좀 생겼어요. 수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러고 한 시간쯤 지나자 엉뚱하게도 파티마의 대나무숲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년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때에도 사연이 궁금하면 설명해 드리겠다고 하고요.
생전 처음으로 겪는 죽은 듯한 고요함이 괴로웠다. 산책을 나섰다. 요란스러운 음악을 들으며. 동네 산을 헤매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로 지은 건물에서 ‘여행사’ 간판을 보았다.
어디든 패키지여행을 다녀오면 어떨까.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고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이 가진 것들에 나도 덩달아 관심을 쏟으며 시간을 좀 보내면 어떨까.
그러기로 했다. 며칠 여행을 준비하느라 바쁠 테고, 가서도 바쁠 테고, 돌아와서도 바쁠 테니까. 도움이 되겠지. 해본 적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