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사랑 이야기 03
잊히는 음식들이 있다. 혼자 살아서 더 그럴 것이다. 냉동실에 우글거린다. 냉장실에도 좀 있지만. 사람들은 냉동실에서 오래된 기억을 파내기도 한다. 냉장실에서 잊혔던 것들은 대개 버려야 한다. 마음이 아프지만. 먹다가 조금 남은 반찬들, 식은밥들, 채소 칸의 오래된 감자, 양파...... 유기농이라고 해도 버섯이나 적채, 양배추, 배추, 무 같은 것들은 꽤 오래간다. 그래서 좀 잊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잊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떡국 꾸미이다. 설날 전에 습관처럼 좋은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든다. 간 소고기 600그램 정도, 굴과 새우살도 그 정도 쓴다. 이걸로 꾸미를 만들어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일 년 내내 먹는다. 소분한 것 하나 꺼내 물을 조금 붓고 떡국떡을 넣고 끓이면 금방 아주 맛있는 떡국이 된다. 김을 좀 뿌리고, 달걀지단 해서 올리고, 대파를 좀 다져 얹으면 훨씬 더 맛있다. 사리 라면을 떡국떡 대신 넣어 끓여도 좋고.
꾸미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다. 시간이 좀 걸릴 뿐. 소고기는 언제나 먼저 잘 볶아서 넣는 게 좋다. 굴과 새우살은 잘 씻어두기만 하고. 해산물을 익힐 때는 언제나 흰 포도주를 조금 넣는다. 잡냄새가 싫어서다. 통마늘도 준비해둔다. 입맛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무슨 음식에나 마늘을 좀 많다 싶을 만큼 넣는 편이다.
조금 큰 냄비에 준비한 것을 다 넣고 물을 조금 많이 붓는다. 적어도 이십 분은 끓일 것이니. 약불로. 조선간장과 양조간장을 반반씩 넣는데 짠 장조림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설탕도 조금 넣도록 하고. 감칠맛을 내자는 것이다. 소고기와 굴, 새우로도 충분하지만 감칠맛은 시너지 효과가 아주 크다. 불 앞에서 기다린다.
올해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페터 한트케)를 읽었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다. 나에게는 잊혀졌던 작가다. 논란은 많지만 글은 읽을 만하다. 나는 플라톤의 엘리트주의가 싫어서 그의 이름조차 싫어했던 적이 있다.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다. 단점도 알고 있어야 하지만 장점을 단점으로 뒤덮어 버리는 것도 옳지 않다. 힘들겠지만 장점은 칭찬해 주어야 한다.
끓어오르면 거품을 좀 걷어낸 다음 불을 낮추고 타이머로 시간을 맞추고 잊는 게 좋다. 생각나면 부엌에 가서 한 번쯤 확인만 하고,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기 전에 식혀야 하니. 가끔 잊어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꾸미를 자주 꺼내 먹게 된다. 아무래도. 그러다가 잊힌다. 설날이 대개 일월말이나 이월초이고 조금만 지나면 봄나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봄나물의 어지러운 향기가 지난날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맛있는 대저토마토도 이때쯤 나온다. 어디에나 넣어 먹어도 맛있고 그냥 먹어도 맛있다. 어쩌면 조금은 잊히는 것이 꾸미의 운명인지 모른다. 몇 년째 잊힌 꾸미가 지금도 냉동실 어디에선가 잠자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잊었던 손님들을 불러야 한다. 냉동실에서 잊혔던 것들이 잊혀가던 꿈을 살려내 주기도 할 테니. 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술도 한 잔 해야 할 거고. 냉동실에는 잊혔던 술안주 거리도 있을 것이다. 잊히는 것은 다시 기억되기 위해서다. 칼로 다져져서 오랜 시간 불로 익힌 것들이라면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