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나와 네가 서로를 초대한 곳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서둘러 남편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로비에 마중 나온 남편의 얼굴에는 지난 5일간의 피로가 역력하게 묻어있었지만 나를 보고 천진하게 웃으며 반가워하는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다.
동생과 함께했던 바르셀로나
거기엔 남편이 있었다
“고생 많았어! 그래도 여기 맛있는 음식 많아서 좋았지? 어떤 거 먹었어?”
하지만 남편이 그동안 먹은 거라곤 호텔에서 나오는 조식과 샌드위치, 근처 펍에 맥주 마시러 가서 안주로 시킨 햄버거가 다였다고 했다. 세상에나.
그 길로 남편을 이끌고 람블라스 거리로 향했다. 내가 찾아둔 맛집이 있다며 호언장담했던 기세와는 다르게 골목 어딘가에 있다는 타파스집을 겨우 겨우 찾았지만 고생 끝에 맛본 음식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파리도 맛있는 음식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처음 접하는 스페인 음식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프랑스 음식이 재료 본연의 향과 맛을 더 돋보이게 조리한다면 스페인 음식은 재료에서 끌어낸 감칠맛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체로 한국인들 입맛에 맞는다는 평이 있나 보다.
“와, 내가 바르셀로나 와서 먹었던 음식들 중에 가장 맛있어! 나는 지금까지 뭘 먹었던 거지?”
남편의 반응에 역시 내가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나 아니었음 이 미식의 도시에서 고작 미국 음식만 먹다 돌아올 뻔했잖은가.
사실 동생네 커플이 다음날부터 합류하기로 한 것에 대해 나로서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이 작은 인정에도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남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위안이 되었나 보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참여했던 야경시티투어에서 남편과 마찰이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라 주요 랜드마크 중 상당 부분을 도보로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그날 저녁에는 출장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회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이 투어를 신청해 두었었다. 하지만 갑자기 남편이 회식을 가지 않고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고 투어를 취소하자니 당일이라 전액 위약금으로 날릴 상황이었다. 급하게 여행사에 연락해 빈자리가 있냐고 물어 남편까지 투어에 합류하기로 했다.
투어를 하는 내내 가이드가 틈틈이 당부하기를,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니 소지품을 조심하라고 했다. 남편보다 유럽 경험치가 높은 나는 이미 소매치기 방지 팁에 바삭했고 덕분에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 내 눈에 남편의 청바지 주머니에 꽂혀있는 지갑이 유독 거슬렸다. 가이드가 주의를 줄 때마다 남편에게 지갑을 가방에 옮기고 앞으로 매라고 했지만 남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괜찮다고 했다. 호기심이 많은 남편은 어느덧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했고 나는 그 틈을 타 남편의 주머니에 내 손을 쑥 밀어 넣어 지갑을 낚아챘다.
“이것 봐. 나도 이렇게 쉽게 빼는 걸 소매치기가 못하겠어?”
순간 남편이 버럭 짜증을 냈다.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아니까 본인이 경계를 늦춘 거지 실제로 수상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본인이 지갑을 뺏겼겠냐며 반격했다. 우리는 티격태격하며 무리 뒤를 겨우 따라갔다. 본인 걱정해서 한 말을 저렇게 기분 나빠할 일인가 싶어 나도 서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출장 전 준비기간까지 합쳐 몇 주를 쉼 없이 달려온 남편으로서는 그저 나와 호텔 방에서 편안하게 재회의 소감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 같다. 게다가 다음날부터는 처제 커플까지 합류할 예정이니 더더욱 그랬겠지. 쉬고 싶은 마음과 나 혼자 투어를 보내기 싫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따라나선 길이라 더 예민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곳은 바르셀로나였고, 노란 전구로 낭낭한 골목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기분도 풀려있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 투어가 끝난 후 돌아오는 길에 츄러스를 사 먹으며 깔깔댔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나는 동생을 떠올렸던 것 같다. 나에게 니꼴라의 이야기를 하며 분홍빛을 띄우던 그 애의 볼이 화르륵 타올랐던 좀 전의 나의 얼굴과 겹치며 씁쓸했다. 결혼하면 동생에게도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 올 텐데 이걸 축하해, 말어? 하다가 달콤 바삭한 츄러스 한 입에, 그걸 먹으며 또 바르셀로나 음식이 자기랑 맞는 것 같다며 호들갑 떠는 남편의 귀여움에 사르르 녹는 이 마음도 다 겪어봐야 하는 행복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동생 커플과 함께할 때, 내 옆에도 남편이 있어서 참 든든했다. 저 둘의 행복이 나에게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저 시절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리며 새삼 남편이 귀하게 여겨졌다.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말을 좀 더 상냥한 방식으로 할걸. 여태 일하고 힘든 사람에게 실컷 놀고 온 내가 좀 더 배려할걸. 매번 한 발 늦게 깨닫고 반성하는 건 아마 남편도 마찬가지겠지. 나의 여행에 가장 많이 함께한 사람은 남편이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짧은 동거 기간으로 애틋한 감정이 동생의 의미를 크게 만들어 함께하는 매 순간 더 느끼고 더 기억하려고 애썼던 것에 비하면 남편과의 시간을 그 당시에 그렇게까지 곱씹었던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혈연으로 묶여있어 끊어질 수 없는 동생과의 관계가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야만 만날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서로 노력해야 하고 배려해야 하는 귀한 손님 같은 사이가 되었듯이 눈 뜨자마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도 바로 옆에 있는 남편과의 관계는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보장되는 당연한 사이처럼 되어버린 건 아닐까.
동생과 짧은 작별을 하고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남편을 만났을 때 마주했던 그의 환한 웃음이 살면서 많은 순간에 나를 지켜주었다. 심지어 내가 그에 대해 실망하고 우리가 과연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일까 의심했던 순간조차. 언젠가 야근 후 늦은 퇴근길 갑자기 내린 비에 버스정류장까지 우산을 들고 슬리퍼를 신고 뛰어오며 차림새만큼이나 무장해제인 웃음으로 힘차게 손을 흔들던 아이 같던 그 모습이 나를 지켰고, 그를 지켰다.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그 아이를 또 어르고 달랬으나 동시에 위안받고 환영받았다.
동생 커플과 함께 지내기 위해 방이 두 개 있는 에어비앤비를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한창 좋을 시기의 커플을 위해 우리는 낮시간의 일부의 일정을 따로 보냈다. 동생을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어 제안했던 커플동반 여행이지만 동생 하나 보고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옆 나라까지 함께 날아온 니콜라를 배려하고 싶었다. 첫날 점심을 함께 먹은 뒤 헤어지며 이따 다시 만나 저녁을 함께 먹고 몬주익 분수쇼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넘도록 둘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분수쇼를 보기 좋은 자리를 잡으면서도 내내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하느라 남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어쩌면 나는 이제 새로 시작하는 커플들에게 그때 배웠어야 했다.
이미 서로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한 사이에도 늘 서로를 일 순위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부부 사이라는 것을. 상황이 특수하니까, 이번뿐이니까 하는 핑계로 나의 우선순위를 남편에게도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처음 한국에서 만났을 때부터 남편과 니꼴라가 꽤 잘 통했다는 것이었다. 아빠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남편이 니꼴라에게 주도를 알려주고 한 발 앞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니꼴라는 네 살 위인 남편을 따랐고 남편도 대화의 결이 잘 맞는 니꼴라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래서인지 서로에게 낯선 곳이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이렇게 넷이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즐거워서 마냥 들떠있었다. 동생네 커플은 분수쇼가 한참 진행 중일 때 도착했다.
“너희 오기 전에 진짜 멋졌는데! 이제 끝나가는 거 같아. 좀 더 일찍 오지 그랬어!”
타박하는 내 말에도 동생은 싱글벙글이었다. 분수쇼가 끝나고 간단히 맥주를 마시러 간 곳에서 동생이 왼손을 내밀어 보였다.
“나 니꼴라한테 프러포즈받았어.”
니꼴라 녀석. 기를 쓰고 여기까지 온 목적이 있었구나. 파리에 사는 두 사람은 바르셀로나에서 결혼을 약속했다. 나와 남편은 이 기념적인 순간의 증인으로서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부부가 되기로 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인연의 힘인지를 우리는 알았다. 비록 어제처럼 별 것 아닌 일 가지고도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가장 먼 사이처럼 느껴지는 게 부부라 할지라도 분명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반짝거림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동생을 떠난 바르셀로나,
거기엔 부모님이 있었다
결혼은 한 사람의 우주를 품는 일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것은 나라에서 나라로 건너오는 일쯤은 우스워지게 만들고, 눈이 빠지게 자기를 기다렸던 언니가 눈에 안 들어오고, 내가 심취했던 ’자매 여행‘을 ’약혼 여행‘으로 만들어버린, 이 커플이 한껏 취해있던 모호하고 낭만적인 그 감정이 사실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통째로 공유하는 거대한 사고이며, 지금까지 상대가 거쳐온 과거를 몽땅 수용하는 막중한 결심임을. 그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의 그릇이 점점 커져 결국엔 내가 우주가 되는 신비로운 과정이 결혼생활인 것 같다. 그렇게 우주론적으로 본다면 혜성이 날아와 충돌하고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등의 사건조차 ‘그럴 수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투명한 잔에 흑맥주와 라거, 에일맥주가 종류 별로 담겨 나왔다. 각자의 그릇에 서로 다른 향미를 담기로 한 두 사람처럼 보글보글 탄산이 기쁘게 피어올랐다. 그로부터 7개월 후, 둘은 니꼴라의 본가가 있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은 아름다웠다. 한국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축제 같은 예식이었고 하루 종일 이어지던 춤과 노래, 게임과 이벤트, 맛있는 음식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 이국적이면서 즐거웠다. 동생 커플의 역사가 탄생하던 순간부터 지켜본 나로서는 더욱 감회가 새로운 날이었다. 나와 남편, 우리 부모님은 결혼식 이후 일주일간 바로 옆에 있는 스위스를 여행했다. 남편이 돌아간 후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포르투갈에서부터 스페인 남부, 프랑스 남부까지 여행했는데 그때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도시가 바르셀로나였다. 어쩌다 보니 나는 동생 덕에 1년도 안 되어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은 것이었다.
바르셀로나는 그렇게, 동생과 내가 서로를 한 번씩 초대한 도시가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두 번째 바르셀로나에서 우리는 모두 동생을 떠나보낸 여운에 시달리던 전우였다. 우리를 휩쓸고 간 축제의 후유는 생각보다 컸다. 여러 도시를 거치며 다양한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며 소중한 추억을 만들면서도 이 자리에 동생이 함께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아빠는 결혼식장에서부터 이상하게 툴툴댔는데 내가 낭만적이라고 치켜세웠던 그 예식의 어느 순간에도 한국에서처럼 ‘혼주’의 역할은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 아빠의 알 수 없는 서운함에 한몫했던 것 같다. 막내딸은 아빠에게 특별했으니까. 늘 엄마 대신 쓴소리를 하는 장녀는 애교조차 없어 아빠의 허세 담긴 애정표현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 아빠에게 동생은 유일하게 본인이 완벽한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마치 내가 동생에게 자매로서의 로망을 갖고 있듯, 아빠도 막내딸에게 존경과 인정의 존재서의 로망이 있었다.
엄마는 결혼 따위 안 할 거라던 애가 이렇게 갑자기 결혼을 결정하고 실행까지 일사천리로 해버렸을 때 안도감만큼이나 강한 헛헛함을 느꼈다. 엄마가 이런저런 감정적인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할 때 나는 사실에 입각해 엄마의 생각을 판단해 조언을 하는 쪽이라면 동생은 엄마의 마음에 기반해 동의든 반대든 그 마음이 흘러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편이었다. 어쩌면 그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에는 동생 쪽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은 멀리 있다 보면 온전하게 실어 보내기 어려운 법이다. 안 그래도 독립적이던 둘째가 이제는 진짜 호적에서도 독립을 한다고 하니 한국과 프랑스 사이 어딘가를 떠돌던 엄마의 속마음은 갈 곳을 잃고 승천도 못하고 나와 함께하는 여행 내내 떠돌았다. 그 감정은 한 번은 김서방에게, 한 번은 나에게 뾰족한 말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 도착할 때 즈음엔, 동생이 결혼한 지도 3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고 아빠와 엄마, 나 모두 바르셀로나가 두 번째 방문이라 (부모님은 몇 년 전 동생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며 바르셀로나를 왔었다) 이것저것 맹목적으로 보러 다니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부모님과의 여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기착점이었던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그제야 동생의 결혼이 우리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서운했던 아빠의 행동과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건축물보다 종류 별로 맛있는 음식보다 동생의 새로운 삶의 시작의 처음과 끝 사이를 연결하는 교두보로 남았다. 동시에 남편과 부모님에게 있어 나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이 완공되면 다시 가자고 약속했지만 어쩐지 다음번에 또 바르셀로나에 가게 된다면 그 시점은 ‘완공’이나 ‘완성’, ‘완료’보다는 뭔가 또 다른 근사한 ‘시작’의 어느 지점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다.
오흐부아!
바르셀로나에서 작별한 싱글의 내 동생.
그리고 우리 둘의 아지트였던 파리의 작은 집.
온전히 나만의 동생이었던 너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