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엔느와 함께한 황홀했던 나흘
나는 주변에서 ‘파리 병자’로 유명했다.
매년 시간과 돈만 생기면 망설임 없이 파리로 향했다. 프랑스의 다른 지역, 프랑스 인접 국가들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거점은 늘 파리였기 때문에 북유럽, 동유럽처럼 프랑스 대륙에서 한 나라를 거쳐 그 이상으로 멀리 가기는 어려웠다. 지금까지도 비유럽권에서는 홍콩과 싱가포르, 그리고 아주 뒤늦게 일본을 가본 게 전부다.
2017년 11월, 나는 또 파리에 가 있었다.
남편이 회사 업무 차 바르셀로나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참에 나도 남편 출장 일정이 끝날 때쯤 가서 함께 여행을 하고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와 접경해 있는 도시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파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뜻이지. 나는 남편의 출장 기간 동안 파리에 먼저 들러 동생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안 그래도 한 달 전, 나와 동생이 대학생일 때부터 기르던 친정집의 강아지 ‘토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는데 나만큼이나 동생도 충격을 받을 게 뻔해서 언제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나 고민했던 터였다. 여행이 결정되면서 아무래도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해줘야겠다 싶었다.
파리의 연인보다 더 애틋한
파리에서의 자매
동생은 언제나처럼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내가 혼자 가는 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얘는 내가 올 때마다 공항에 나온다. 그러고는 리무진 비용 비싸다고 툴툴거려 돌아갈 때는 결국 내가 자기 표도 사게 만든다. 파리로 들어가는 편도 편을 매번 왕복 금액으로 결제하는 셈이다. 그래도 동생과 함께 동생의 집까지 가는 그 길은 나에게 늘 파리 여행의 설레는 인트로가 된다.
열쇠로 두 번 돌려 여는 공동 현관문.
좁은 복도 끝에서 반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오르자마자 맞닿아 있는 작은 문을 또 다른 열쇠로 연다. 1층보다 면적이 작은 2층엔 동생이 살고 있는 이곳 한 세대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거실 겸 주방이 나오고 한쪽 끝에 작은 방이 있다. 그 방 안에 작게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있다. 파리에 혼자 가게 되면 늘 머무르는 곳이라 나에게는 ‘동생 집’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몇 번 와 봤다고 정이 들었는지 친정에 갔을 때와 비슷한 안락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지.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도착하자마자 대충 짐을 풀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동생은 파리에서도 지인 몇몇과 힘을 합해 매년 김장을 담갔다. 한국에서 주부인 나도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하다. 덕분에 잘 익은 묵은지가 자그마한 냉장고의 절반 지분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었다. 프랑스에서 맛있는 것 중 하나가 고기다. 소고기뿐 아니라 돼지고기도 탄탄하고 육향이 짙은데 특히 여기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삼겹살 부위는 매우 저렴하기까지 하다. 들기름을 두른 냄비에 묵은지를 4분의 1 포기 정도 넣고 지지다가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 넣고 물을 자박하게 조금만 부어 졸이듯 끓인 후 다시 쌀뜨물을 붓고 다시마를 함께 넣는다. 자글자글 한참 끓이다 마지막에 불려둔 당면까지 넣으면 깊은 맛의 김치찌개 완성!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끓여? 엄마가 해주던 맛이다. 나는 아무리 해도 이 맛이 안 나던데. “
땀을 뻘뻘 흘려가며 그 많은 찌개를 둘이서 다 먹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노곤노곤해진 시간, 이제는 입을 떼야할 순간이다.
“있지, 사실은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왔어. 토이가.. ”
“... 죽었다는 거지?”
동생의 확인사살 같은 그 말에 먼저 눈물을 보인 건 나였다.
“그럴 것 같았어. 지난번 한국 갔을 때도 이미 너무 쇠약해진 게 눈에 보이더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내가 여기에 있어 어쩔 수 없는 거니 받아들여야지. 나 괜찮아 언니, 울지 마.”
동생은 우리 식구 중 토이와 가장 친했다. 우리 모두 토이를 ‘반려 동물’로서 살뜰히 챙겼지만 동생은 친구로 여겼다. 혼자서 생각이 많고 남에게 고민을 잘 털어놓지 않는 동생은 가끔 토이를 앉혀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위안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 애가 토이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눈시울은 붉어졌지만 내가 상상했던 오열은 없었다. 타국에서 혼자 8년을 살면서 나름 감정의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을 깨우친 것 같아 일면 짠한 마음도 들었다.
김치찌개와 함께 마시기 시작했던 와인이 절반쯤 남았을 때 이번에는 동생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작년에 한국에 함께 왔던 ‘니꼴라’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다는 거였다. 물론 한 번도 남자친구를 소개한 적이 없었던 동생이 한국까지 그를 데리고 왔을 때 우리는 이미 둘 사이가 진지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 관계가 발전할지는 몰랐다. 왜냐하면 동생은 자칭 ‘비혼주의’였고 혼자 사는 게 정말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이다. 동생은 아빠 판박이인 나와는 달리 엄마를 빼닮아 아담한 체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생김새를 가졌다. 끼도 많고 애교도 넘쳐 사교성이 좋아 보이지만 남한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성향은 방어적인 성격이 되어 본인에게 호감을 가진 남성이 건네는 호의조차도 호락호락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멋대로 먼저 잘해줘 놓고 그만큼 마음을 열기를 바라는 게 부담스럽다나. 그래서 우리는 니꼴라를 처음 보았을 때 우리가 ‘유럽 남자’하면 흔히 떠올리는 로맨틱한 외모가 아님에도 이 친구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그저 인상이 좋고 차분한 스타일이구나 했는데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이 친구가 비교적 보수적인 한국인의 정서로 보아도 확실히 반듯하고 올곧은 심성을 지녔으며 상대를 참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파리에 오기 전, 동생에게 나흘만 파리에 머무르고 바르셀로나로 넘어가야 하니 너도 나흘 내내 일하는 시간 빼고는 나랑 놀아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대뜸 니꼴라와 일정을 맞춰 바르셀로나에 가보는 걸로 상의해 보겠다고 할 때부터 예견했던 전개였다.
그렇게 첫날밤, 늦게까지 수다를 떤 것을 시작으로 4박 5일 동안 동생과의 밀착데이트를 즐겼다. 사실 나는 수년간 동생이 이렇게 먼 곳에 살고 있음으로 인해 때때로 큰 아쉬움을 견디며 지냈다.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친구에게 모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또, 부모와 친한 편이지만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우리 자매는 서로에게 대나무숲이었다. 서로의 표정만 보아도 한마디 말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사이이기에 카톡이나 보이스톡으로 나누는 대화는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평소에 나처럼 여동생이 있거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가끔 만나 함께 맛집도 가고 쇼핑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도 엄마가 무심한 말로 속을 긁을 때, 누구에게 말하기는 부끄러운 사소한 이유로 남편이 미울 때 앞뒤 생각 없이 툴툴 털어내고 싶은데 시차를 계산해 이미 식은 감정을 텍스트로 또 한 번 정렬해 보내면 결국 시시한 팩트만 남아 버린다. 뜨거운 소면을 건졌을 때 바로 찬물을 부어야 탱탱해지는데 시간이 지나 뒤늦게 헹궈 팅팅 불은 느낌과도 비슷하다.
어느 때보다 다정했던
시크한 나의 파리지엔느
대학생 때까진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 취직 후에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 썼던 월급으로, 결혼하고는 맞벌이 살림으로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니어도 궁핍한 적 없이 지내온 나에 비해 혼자 벌어 혼자 생활하는 동생은 씀씀이도 생활방식도 나와 완전히 달랐다.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도 본인의 독립성이 침해당할까 봐 단칼에 거절한 덕에 한국으로 소환되지 않고 여태 버텨왔지만 동생은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 파리에서 흔히들 ‘하녀 방’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몇 년을 지냈다.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 간이로 만들어둔 샤워실에서 씻고 나면 훈기가 집 안 가득 차오르곤 했다. 화장실은 복도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잠들기 직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는 나로서는 늦은 시간 어둡고 긴 복도를 따라가는 동안 긴장감으로 손에 쥔 두루마리 휴지를 꽉 움켜쥐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동생은 한국에도 올 형편이 못되었기에 부모님과 내가 번갈아 가며 파리에 가서 동생을 만났다. 이런 생활을 감수하면서도 파리에 계속 머무는 동생을 보며 엄마는 혀를 찼다.
“저 계집애는 나랑 살기 싫어서 도망쳤나 봐. 그러지 않고서야 지 방보다 작은 이 집에서 이게 뭔 꼴이라니.”
나는 동생이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를 이해했지만, 내가 파리까지 갔는데도 함께 외식 한 번 하기를 망설이는 동생이 안쓰러웠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고 지금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춰 살기 시작한 후에도 동생은 내가 파리에 가면 부담스러워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함께 다니다가는 생활비가 금세 오버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동생 집에 지내는 동안 내가 밥 값을 내고 장도 봐주려고 했지만 빈 말이라도 ‘이건 내가 사줄게’라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 동생에게 서운한 적도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비행기 값을 들여왔는데 왜 내가 다 사줘야 하냐며 볼멘소리를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돌아오기 전 남은 유로화는 모두 주고 오기도 했다.
그랬던 언니도 몇 해를 보내며 거듭 철이 들고 동생도 시근이 난 것인지 이번 만남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당시 동생은 약국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출근 시간을 조정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다. 마치 한국에서부터 함께 여행 온 것처럼 입장료를 내는 뮤지엄도 가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했다. 내가 사는 경우가 많았지만 동생도 최대한 본인 몫은 스스로 부담하려고 했고 정말 놀랍게도 나에게 밥을 사주기도 했다!
동생은 약국에서 일하기 전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현지 여행사에서 근무를 했었다. 신혼여행 때 내가 이것저것 투어를 예약해서 다닐 동안 친해진 가이드에게 동생이 여기에서 유학생으로 있다고 했더니 마침 인력이 더 필요한데 면접을 봐 보라고 먼저 권유를 해와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동생은 사전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파리와 근교, 인접 국가들로 출장을 다녔고 고객들에게 소개해줄 관광지와 맛집을 회사 경비로 다닐 수 있었다. 그때 축적한 데이터로 동생은 내가 미처 몰랐던 곳들을 안내해 주었다. 파리에 사는 사람만큼은 아니어도 파리 N회차인 파워J 형 인간으로서 누구 못지않게 파리를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하던 나도 전문 가이드였던 동생의 추천은 믿을만했다. 봉마르셰 백화점 내에 있는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고 팔레드도쿄 옆 에펠탑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파리여서도 있겠지만 동생과 이런 시간을 가진 적이 거의 없었던 나로서는 그동안 염원했던 ‘자매 놀이’를 제대로 하는 기분이어서 더욱 설렜다.
동생이 일하러 간 시간 동안에는 동생 집을 정리하고나서 동생이 ‘그런 데는 관광객이나 가는 데야’하는 곳들을 골라 다녔다. 그러다 발걸음이 동생이 일하는 약국과 가까운 동네로 향하면 걔가 좋아하는 밀크티집에 가서 펄이 듬뿍 든 타로밀크티를 사서 약국에 들렀다. 함께 관광객인 듯한 기분도 좋았고, 일상 속에서 함께 하는 듯한 기분도 좋았다. 그렇게 그 해의 파리에서의 나흘은 매일매일이 근사한 데이트 같았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이지만 어째 세월이 갈수록 더 딸같이 느껴지는 건, 어쩌면 서로 떨어져 살며 부대낄 일이 없어 온통 자매로서의 좋은 점만 미화되어 그리움만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파리에 사는 더없이 친애하는 동생에게 만날 때마다 여행자이자 손님이라는 핑계로 어리광을 부렸던 건 오히려 나였다. 불과 몇 개월 후에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이 달콤한 시간에 취해 다음에도 또 이런 시간을 보내야지라고 결심했던 그때에 동생은 ‘결혼 전 마지막으로 자유로울 때, 돈 생각 하지 말고 아쉬움 없이 언니랑 놀아줘야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품 안에 꼭꼭 더 담아두려고 했던 그 애가 다른 이의 품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날 아침, 내일이면 다시 만날 거라 쿨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매번 드골 공항에서는 나 혼자 질질 짜고 동생은 내 등을 떠밀었었는데 마치 함께 살던 때처럼 각자 일정을 마치고 집에서 만날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 수 있었던 것도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아비안또, 내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