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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힐링 여행, 친정 가는 날

모두의 드라이브 코스 양평으로

by 바다기린
친정집 옥상에서 바라본 경치


운전면허는 한 번만에 땄다.

필기시험은 문제집 하나를 사서 전부 풀고 두 번을 더 처음부터 끝까지 보며 오답 검토까지 했다. 남편은 일정 점수만 넘기면 되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했지만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는 후기도 많이 봤던 터라 안심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버렸다. 실기시험은 액셀레이터를 너무 세게 밟아 감점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무난하게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주행시험날, 나는 비장하게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이 집에서 많이 멀지는 않아도 익숙하지 않은 동네였고 황량한 주변 분위기가 어쩐지 불편했다. 매주 시간을 맞춰 이곳에 와서 콩알만 한 심장을 부여잡고 테스트받는 것도 오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시험까지 통과해 다시는 여기를 오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면허를 내 손에 넣기까지

차량에는 감독관 한 분과 나를 포함 응시생 두 명이 탑승했다. 한 명이 주행시험을 볼 동안 다른 한 명이 동승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 순서가 뒤였던 것이 나에겐 신의 한 수였다. 내가 뽑은 D코스는 그 학원의 주행시험 코스 중 가장 어려운 코스로 유턴 2번과 좌회전 다수, 6차선 사거리까지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다. 먼저 운전대를 잡은 응시생은 내 또래의 여자분이었는데 뒷좌석에서 눈으로 시뮬레이션한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연습할 때 몇 번이고 가 본 길이었어도 연수생이 보는 시야는 여유도 없고 좁다. 운전대에서 떨어져 그 길을 다시 보면서 동시에 감독관이 어떤 포인트를 체크하는지 살피다 보니 긴장감이 조금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여자분은 3분의 2 지점에서 실격하고 말았다. 감독관은 그녀에게 차를 갓길에 세우고 내리라고 했다. 그 자비 없는(?) 광경을 보니 애써 유지하던 평정심이 흔들렸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진행방향을 바꿀 때마다 최면을 걸듯 나지막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할 수 있다..’ ‘잘 하자’ ‘.. 아이씨..’

“욕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관은 웃는 얼굴로 엄격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입으로 반, 손으로 반 운전을 해서 무사히 출발점까지 돌아왔다. 감독관이 나에게 한두 번만 더 실수했다면 떨어졌을 거라고 히죽거리며 축하한다고 말해 뻘쭘했지만 길바닥에서 운전대를 빼앗기는 참극은 피했고, 면허도 땄다! 한 번에 패스한 만큼 나는 내가 금방 자유롭게 운전을 하고 다닐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뒤에 취직한 회사는 말도 안 되게 바쁜 곳이었고 간혹 시간이 날 때 남편을 조수석에 모시고 운전 연수를 부탁드렸으나 역시 운전은 남편한테 배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초보인 나보다 본인이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집에 돌아오면 두통약을 먹는 남편을 보니 그마저도 두 번 할 것을 한 번 하게 되면서 점점 운전을 연습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면허를 따고 4년 뒤, 이직을 하고 여유가 좀 생기자 운전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가장 큰 동기는 ‘친정에 혼자 가는 것’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동생이 프랑스로 떠난 뒤 부모님은 잠실에서 하남으로 이사를 했고, 하남에서 양평으로 또 거처를 옮겼다. 전원생활을 꿈꿨지만 주택살이는 엄두가 나지 않아 북한강이 바로 앞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로 타협했다. 그래도 명색이 아파트에 양수리에서는 중심부라 대중교통이 닿기는 했으나 우리집에서부터 가려면 전철을 두 번 환승하고 배차 간격이 30분인 마을버스까지 타야 해서 터무니없이 오래 걸렸다. 하남도 멀었지만 가기가 어렵지는 않았었는데, 양평은 9호선 끝인 ‘종합보훈병원’ 역까지 부모님이 태우러 나오시든가 아님 남편이 운전해서 함께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문득 친정에 가고 싶은 기분이 들어도 남편의 스케줄이나 컨디션까지 고려해야 하고 친정에 가서도 하룻밤 이상 머물기 어려웠다.


양평을 내 발로 가기까지


어떻게든 돈을 들이지 않고 운전을 마스터하고 싶었지만 이미 장롱면허나 다름없으니 운전연수는 각 잡고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친구로부터 편하고 부담 없이 잘 가르쳐 주신다는 50대 후반의 여자 강사분을 소개받았고 10시간 연수를 부탁드렸다. 내가 요청한 코스는 자주 가는 여의도와 친정집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강사님 지도대로 연습하기 좋은 도로들을 반복해서 돌았다. 어느 정도 서로 사인이 맞고 익숙해졌다 싶을 때 여의도 더현대백화점을 갔는데 가는 길도 무섭고 주차장도 무섭고 주차비도 무서워서 여긴 그냥 앞으로도 전철 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망의 양평 가는 날. 올림픽도로를 타는 것부터가 나에게는 미션이었다. 차선을 바꾸는 게 가장 어려운데 진입하자마자 두 차선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내 도로보다 훨씬 빠른 속도감에 타이밍 잡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양평가는 길만큼은 다른 대안이 없기에 여의도처럼 포기해 버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강사님의 정확한 디렉션으로 친정집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의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 때문에 엄마 아빠 얼굴만 보고 바로 내려왔지만 또다시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바로 돌아서 가자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연수 첫날 강사님이 주행 중에 숨 좀 돌리자며 커피를 사주신 게 기억났다.


“선생님, 여기 카페 경치가 좋아서 서울에서도 많이들 오는 곳인데 커피 한 잔 사드릴까요?”


워낙 성격이 털털하시기도 하고 그동안 차에서 오고 가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서 그런지 처음 함께 커피를 마셨을 때보다 더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 긴장을 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로 혼자 양평을 거리낌없이 가게 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더 걸렸다. 분명히 일단 올림픽도로를 타면 하남까지는 직진인데 한 날은 내비게이션이 잠실에서 빠지라고 안내를 하는 통에 복잡한 진출입로를 두 번이나 겪으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커브 지는 도로에서 차선을 넘을까 봐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바로 옆으로 차가 바싹 붙어 지나가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그 차가 저 앞으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점점 내비게이션이 최단 시간 루트를 추천해도 나에게 가장 편한 길을 선택해 갈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쯤에 차가 많아지고 어느 쯤에 차들이 속력을 내는지도 미리 알게 되었다. 트렁크와 뒷유리에 덕지덕지 네 개나 붙여두었던 ‘초보운전’ 사인도 한 개로 줄여가며 제법 숙련된 초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친정집 바로 옆 공원


이쯤부터 나는 혼자서 친정에 가는 재미가 들렸다. 남편으로서도 예전보다 함께 처가에 가는 빈도가 줄어들었으니 나쁘지 않은 변화였을 것이다. 내가 친정에 갈 때는 정해진 루틴이 있다. 가는 길에 스타필드 하남에 들러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가 트레이더스에서 엄마에게 미리 물어봐둔 필요한 것들을 사서 오후 서너 시쯤 친정에 도착하게 간다. 스타필드는 친정까지 15분 거리라 이미 거의 도착한 거나 다름없어 마음도 편하고 마치 양평 가기 전 마지막 문명의 게이트처럼 느껴져 매번 나의 방앗간이 된다. 무엇보다 남편 없이 혼자 먼 거리를 운전해 주차장에 무사히 주차를 하고 홀가분하게 혼자 쇼핑몰 안을 돌아다닐 때의 해방감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친정은 양평 초입인 양수리에 있다. 두 동짜리 아파트는 작은 규모 덕에 강 바로 앞에 터를 잡아 뷰가 참 좋다. 아파트 옆으로는 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어 강을 바라보며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고 조금만 마음을 먹고 걸으면 물의 정원이나 두물머리도 멀지 않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만 나가면 서종면인데 여기에는 대규모 카페와 맛집이 많고 점점 양평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자연과 가까워져 금세 서울 풍경은 잊게 된다. 보통은 친정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다 오지만 어쩌다 상황이 맞아 사나흘 이상 있게 되면 외할머니 산소가 있는 춘천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한 번은 친정에 열흘 정도 있어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와 매일 새로운 산책로를 걷고 장을 봐다가 밥을 해 먹고 같이 스타필드에 있는 찜질방을 가기도 하면서 방학처럼 지냈다. 자주 가다 보니 매번 들르는 빵집과 카페도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오전에 빵집에 가 빵을 넉넉히 사고 카페에 가 원두를 사면서 서비스 커피 한 잔 받아 마시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자 필수 코스가 되었다. 사실 누구보다 도시를 좋아하는 나는 아직은 서울을 떠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친정이 양평이어서 잠깐씩 기분 전환을 하러 올 수 있다는 점이 점점 마음에 든다.


수련이 가득했던 세미원, 양귀비를 보러 갔던 물의정원


친정에는 이틀 이상 있으면 엄마와 싸우기 시작한다는 딸들의 딜레마가 있다. 이 과년한 딸도 이제 마흔이라 싸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머무는 일수에 비례해 서로에게 디테일하게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너는 지난번에도 새 가방 들고 오더니 이번에도 못 보던 거 들고 왔네. 돈 좀 아껴 써라 “

“엄마가 나를 한 계절에 몇 번이나 본다고 그래. 올 때마다 다른 거 들어서 그렇지 다 있던 거거든?”


“엄마, 바깥 창문을 열어두고 방문을 닫아두면 뜨거운 공기가 정체되잖아. 장 있고 보관 식품 많은 곳인데 이렇게 두면 어떡해.”

“아유, 평소에는 열어두거든? 다 알아서 한다. 야, 거기 간 김에 세탁기에서 빨래 좀 꺼내와.”


딸이 손님인 건 딱 이튿날 아침까지인 걸로. 남편 없이 친정에 가니 더 필터 없이 혼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격의 없이 편안한 시간도 뒤따른다. 자세를 고쳐 앉거나 체면 차릴 필요 없이 딸과 함께 살았던 엄마 아빠의 모습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았던 딸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다. 아빠가 얄미운 행동을 하면 엄마랑 둘이 각자의 남편을 흉보다가 (남편 미안. 자리에 없는 사람만 손해야) 저녁은 나가서 아귀찜을 먹자며 둘이서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 너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해서 셋이 또 신나게 집을 나선다. 엄마 아빠와 어디 여행 가는 것도 정말 좋지만 이렇게 한 달에 한두 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일상에서 가장 가깝고 빠르게 누릴 수 있는 힐링인 것 같다. 반대로 엄마 아빠가 우리 집에 오실 때는 양평에선 배달이 안 되는 피자나 햄버거를 시켜 먹거나 서울 시내를 구경하는 등 또 다른 재미가 있지만 아무래도 난 자리가 더 표가 난다고, 같이 있다가 가 버리면 마음이 많이 헛헛해서 나는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더 낫다. 엄마 아빠도 내가 집에 돌아갈 때 그렇겠지. 그래도 두 분이 함께 계시니 다행이다. 내가 가는 편이 더 좋은 이유 또 하나는 친정집에 가는 길이 기가 막힌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해서이다. 이제는 운전에 조금 여유가 생겨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팔당대교를 건너며 마주 보이는 산이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색이 변해가는 게 2~3주 사이에도 미묘하게 달라 보이기도 해서 신기하더라. 그저 친정집에 가는 이런 소소한 일탈도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은 많은 행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건강하시고, 사이좋게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

남편이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을 존중하고 본인도 혼자 잘 있을 줄 안다는 것.

시간에 큰 구애 없이 기분이 내킬 때 갈 수 있다는 것.


아마 앞으로 아이가 생기거나 내가 또 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면 이 시기도 ‘한 때’로 기억되겠지. 그때까지는 최대한 이 시간을 즐겨보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냉동실에 소분해서 넣어두었던 빵이 다 떨어져 가네? 어쩔 수 없이 조만간 또 양평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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