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기리며
도쿄행은 순전히 즉흥적이었다.
2022년 11월이었고, 1년 4개월째 시험관을 하며 두 번의 유산을 겪은 후였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시험관에 도전하고 있고 어느 정도 이 장기전에 익숙해져 있지만 그때의 우리는 적잖이 의기소침해 있었다. 처음 시험관을 할 때만 해도 금방 아이가 생겨 우리 둘만의 시간이 곧 끝나겠지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었는데, 점점 결과는 오로지 하늘에 달린 것 같다고 느끼게 되었다. 또다시 시험관은 실패로 판정 났고,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여서 좋았던 처음
코로나 이후로 국내 여행은 종종 다녀왔지만 해외여행은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이참에 가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몇 년만의 해외여행에 갑자기 멀리 떠나기는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여행 준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올린 곳이 일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일본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남편은 대학원 때 학회로 다녀온 게 다였다.
둘 다 일본은 처음이나 다름없으니 아무래도 도쿄를 먼저 가야겠지? 겨울이니까 뜨끈하게 온천도 다녀오자. 그럼 하코네가 좋겠네!
일사천리로 목적지를 정하고 세부적인 방문지를 정하려고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본에는 우리 둘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왜 결혼생활 10년 동안 일본에 갈 생각을 안 해봤을까 싶을 만큼.
여행은 시작부터 설렘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인천공항은 아침 이른 시간이라 문을 닫은 매장이 많음에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로 여행의 활기가 가득했다. 남편과 나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도쿄 긴자의 호텔에 체크인을 할 때까지 매 순간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함께하는 해외여행이 처음인양. 첫 일정은 친구에게 추천받은 스시집에서의 저녁 식사였다. 오픈런을 해야 겨우 먹을 수 있다고 들어서 5시가 되기 전부터 웨이팅을 했다.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영접한 일본의 초밥과 나마비루는 기대보다 더 맛있었다. 우리는 연신 건배를 하며 한 피스 한 피스를 음미했다.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내가 그와 여행하는 이유였다. 무엇이든 남들보다 더 섬세하게 느끼고 남들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어서 여행 계획을 짜면서부터 그 모습을 기대하게 된다.
식사를 마친 후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래된 가베집에 가서 진한 커피를 마셨다. 오늘 밤은 카페인 때문에 잠을 못 자도 행복할 것 같았다. 엄청난 각성의 힘으로 긴자에서 전철을 타고 롯폰기로 향했다. 한 달 뒤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일루미네이션을 보기 위해. 쭉 뻗은 도로 끝에 우뚝 선 도쿄타워를 배경으로 가로수마다 촘촘하게 엮인 은빛의 전구들이 마치 설탕과자처럼 보였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그 횡단보도를 수차례 건너며 인증샷을 찍었다. 연인들처럼, 서로를 정성스럽게 카메라에 담았다.
영롱했던 그 길의 끝에 츠타야서점이 있었다. 일본어로 된 책들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곳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특히 아기자기한 일본의 그림체로 가득한 동화책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림 그리는 게 취미인 남편은 그 코너에 오래 머물렀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게 그로부터 2년 뒤 남편은 동화책을 내게 되었다.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안 좋은 일들을 겪어야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의외의 기쁨도 마주하게 된다는 걸 충분히 아는 나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도 그 여행 내내 우리가 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 같은 건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것들을 열심히 탐미하며 일상에서는 나누지 못했을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도쿄여행에서 안 하던 일을 많이 했다. 그중 하나가 남편의 명품 쇼핑이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아닌 남편에게 기억에 남을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나보다 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 남편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간 속내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나는 손사래를 치는 남편을 이끌고 디올과 프라다, 로에베 매장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로에베에서 남편에게 어울릴만한 가방을 찾았다. 엔저와 텍스리펀의 효과로 국내에서보다 50만 원 정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애 있으면 이런 거 못 사. 지금 아니면 이제 평생 못 사줄 수도 있어.”
라고 말하며 우물쭈물하는 남편을 뒤에 세워두고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지만 사실 나도 등골이 쭈뼛거렸다.
누가 채갈까 쇼핑백을 단단히 부여잡고 이치란 라멘을 먹으러 갔다. 역시 서늘한 가슴엔 시원한 생맥주지! 돈코츠 라멘의 짠기와 맥주의 고소함이 어우러지니 짜릿한 감동이 밀려왔다. 원래 맥주는 노동 후 먹는 맛이 제일인데, 돈 쓰는 일도 그만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가 보다.
함께여서 가능한 지금
하코네에서는 료칸에서 달밤에 발가벗고 둘만의 노천탕을 즐기며 해방감을 만끽했고 다음날엔 하코네 폴라 미술관에서 인상파 작품들을 감상하고 관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했다. 우리는 마치 데이트를 하는 사이처럼 일정 내내 시밀러룩으로 맞춰 입고 장소와 경우에 걸맞게 갖춰 입어 보기도 했는데 이 또한 익숙한 남편과의 여행을 ‘데이트’처럼 느끼게 해 준 시도였던 것 같다.
우리에게 일본여행의 최대 매력은 ‘편의점 털이’였다. 저녁마다 편의점에서 맥주, 마른안주, 과자, 푸딩, 타마고산도 등 마음에 드는 주전부리를 사서 객실에 돌아와 태블릿 PC에 저장해 온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우리만의 뒤풀이를 즐겼다. 군것질을 맘껏 한다는 거 빼고는 집에서와 다르지 않은 저녁시간 풍경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떠난 여행에서 일상과 가장 비슷한 일을 할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니 어쩐지 아이러니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아이에 대한 생각 역시 이 여행으로 떨쳐질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나처럼 남편도 수많은 순간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이와 함께라면’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행의 시간들은 같은 생각에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 평소에도 하루쯤 ‘치팅데이’로 생각하고 저녁을 거하게 먹으며 영화라도 한 편 느긋하게 보면 그 자체로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
- 결국 아이 없이 살게 되더라도 이렇게 둘이 여행 다니고 위해주면 충분히 즐겁지 않을까?
- 부부 간에도 서로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리 행복한데 아이와 함께라면 그 마음은 얼마나 충만할까.
나이가 들면서 사회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커뮤니티가 축소되는 걸 몸소 느낀다. 직장에서는 직급이 높아지니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 수만 늘어나고 집에 있어도 각자의 생활로 스케줄이 저마다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 아이가 나에게 새로운 만남과 경험을 만들어준다. 학부모 모임이 생기기도 하고 동네 친구를 만들 수도 있다.
때문에 아이가 없는 오래된 부부에게 ‘새로운 경험’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각자 취미를 가지거나 외부 활동을 하더라도 그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간접 경험이 되니 좋지만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야말로 전에 없던 대화거리를 만들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취미로 삼기엔 비용이 많이 들긴 해도 계획 단계부터 여행 후 여운까지 합치면 유효 기간이랄까, 어쨌든 우려먹을 수 있는 시간이 꽤 되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떠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후로 시험관이 실패할 때마다 우리만의 ‘일탈’을 즐겼다. 몇 달 전부터 실패를 예견하고 티켓팅을 하는 건 앞뒤가 바뀌는 것 같으니 여전히 멀리 여행하는 것은 어렵고, 일본이나 국내로 떠나거나 일정이 안 되면 하루쯤 참았던 술을 근사한 안주와 함께 마신다거나 하는 식으로 당장에 결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모색한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마음에 보상을 하고 다음번을 다짐한다. 어쩌면 끝내 우리가 부모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부부로서의 의미는 잃지 않는 사이이길 바라면서, 오늘도 나는 남편과 데이트를 한다. 무슨 데이트?
백화점 이벤트에서 3분의 1 가격에 구입한 소고기 구워 먹는 집 데이트! 오늘은 우리 집이 야끼니꾸 식당이다. 현지에서 맛있게 먹었던 양배추 샐러드도 만들어볼 생각이다. 여행지에서 좋았던 것들을 일상에서 재현해 보는 것도 남편과 함께하는 여행이 남기는 즐거움 중 하나다.
어떤 이유로든 부부사이에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어디든 둘이 여행을 떠나봤음 좋겠다. 연인놀이를 하며 알콩달콩한 여행이든 부부싸움까지 더한 지지고 볶는 여행이든 끝나고 같은 집으로 같이 돌아올 때 여행지에서 좋았던 감정은 데리고 들어가고 나빴던 기억은 버리고 들어가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