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밖으로 이어진 인연
베네치아로 본섬으로 들어가는 기차들이 모이는 메스트레역. 그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서자 그녀가 웃었다. 늘 그랬듯 활짝은 아니고, 희미하지만 푸근하게.
“잘 지냈어?”
매일 보던 사이였는데 못 본지가 두 달이 되어갔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여기가 현실감 없이 베네치아여서일까 반가움만큼이나 어색함이 밀려왔다.
“부장님은요? 저 너무 많이 탔죠?“
그렇다. 그녀는 나의 상사였다.
전 직장 생활 8년 동안 나에게 남은 가장 큰 자산.
그녀는 나에게
상사에서 멘토가 되었다
입사하고 1년 동안 나는 회사에 적응하지 못.. 아니 사실 회사가 나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동료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나는 규율과 절차보다는 내가 맡은 일에만 집중했고 의견을 내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결국 고분고분하지 않은 신입은 남들과 함께하는 일 대신 규모가 작은 프로젝트를 도맡게 되었는데 그게 우연찮게 내 적성에 맞았던지 성과가 잘 나와서 ‘그래도 일은 잘하네’라는 평가를 막 받기 시작한 참이었다. 하지만 승진을 하려면 더 큰 프로젝트를 경험해야 했기에 팀에 소속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차장급 중 아무도 나를 팀원으로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일할 준비는 되어 있었는데 일이 없었다. 그때 소위 ‘폭탄 처리반’처럼 나선 사람이 바로 그분이다.
M 차장님은 나를 다루는 법을 알았다. 내가 연차를 붙여서 길게 쉬어도, 점심시간에 조금 늦게 들어와도, 고객사 미팅을 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업무에 지장을 주는 정도가 아니면 제지하지 않았고 본인이 생각할 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골라 맡겨주셨다. 그렇게 차장님과 함께 하면서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대리가 되었고 남들보다 먼저 과장이 되었다. 그 사이 차장님도 부장님이 되었다. 부장님이 끌어안은 건 나 이후로도 몇 명이 더 있었고 우리 팀은 점점 커졌다. 차장 직급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프로젝트가 늘어 팀은 쪼개졌고 나와 다른 과장이 각 팀의 비공식 PM이 되었다. 이 상태라면 차장이 되는 것도 머지않아 보였다. 그때 내 발목을 잡았던 건 우리 부장님이 차장님이던 시절이었다. 맡은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마는 나에게 팀원들을 이끄는 것도 업무 완수의 일환이었기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인정받은 비결이었던 ‘성과주의‘가 실무자로서는 장점이지만 관리자로서는 약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때의 차장님처럼 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줄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 부장님으로서 그녀가 하는 업무는 숫자 감각이 많이 필요했다. 성과를 수치화하고 예산을 평가하고 집행을 주관해야 했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없었다.
그 무렵 부장님이 개인적인 사유로 반년 정도 휴직을 하게 되었다. 임시 계약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부장님은 안타깝게도 이 큰 팀을 감당하지 못했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의 온라인 홍보를 대행해 주는 마케팅 회사였는데 당시 우리의 고객사는 소위 ‘갑질’로 악명이 높았다. 제안이나 아웃풋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필터 없이 모욕적인 말을 하기도 했고 갑자기 디렉션을 번복하는 일도 빈번해 야근은 물론 주말 근무도 잦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을’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일을 해주는 ‘파트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눅 든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고객사 담당자도 나에게만큼은 유한 태도를 보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소통의 창구가 되었고 새로 온 부장님은 안팎으로 통솔력을 잃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드센 고객사에게 휘둘리는 와중에 회사에도 적응해야 했던 그분의 혼란이 이해가 되지만 그때는 우리 모두 그분을 신뢰하지 못했고 원망했다. 하루빨리 M부장님이 돌아오시기만을 바랐다. 내가 동생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2주간 프랑스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그분은 난색을 표했다. 워킹데이 기준으로 5일 정도만 연차를 쓰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서.
그동안 매년 2주씩 프랑스를 다녀올 수 있었던 건 다 M부장님의 쉴드 덕분임을 이때 알았다. 그러면서도 왜 여태 잘만 쓰던 연차를 하필이면 동생 결혼식 때 눈치 보며 써야 하는 건지 억울했다. 다 저 융통성 없는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혼자 해오던 고민에 연차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지며 나는 그냥 퇴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사님이 나를 불러 한 달간 휴직을 줄 테니 여유 있게 프랑스에 다녀와서 M부장님이 복직할 때까지 PM을 맡아주면 어떻겠냐며 연봉도 1,000만 원 올려주겠다고 통 큰 제안을 하셨다. 지금의 부장님이 아무래도 못 버티겠으니 그만두겠다고 나보다 먼저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어서 내가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게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그때 나는 남편과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남편은 이참에 그렇게 좋아하는 유럽에 최대한 오래 있다 오라고 했다.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는 90일을 꽉 채운 계획도 완성되어 있었다. 남편과 함께 네덜란드와 파리를 여행하고 먼저 가 있을 우리 부모님을 만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있을 동생 결혼식을 준비한 후 예식이 끝나면 바로 옆인 스위스를 일주일간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은 한국에 돌아오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파리에 돌아와 재정비를 한 뒤 포르투갈부터 스페인 남부를 거쳐 프랑스 남부까지 여행하고 부모님이 귀국하신 후엔 나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한 뒤 마지막 한 달은 동생이 있는 파리에 집을 렌트해 지낼 예정이었다. 앞서 적은 여행기에서 부모님과의 네르하, 니스 여행도 이때 다녀온 것이다. 꿈같은 버킷리스트 달성을 목전에 둔 나였지만 이사님의 제안에 솔깃한 건 사실이었다. 인정욕이 강한 나는 ‘지금은 너 아니면 안 돼’처럼 느껴지는 회사의 대응에 조금 우쭐해졌다.
그리고
멘토에서 언니가 되었다
고민이 길어져 M부장님께 솔직히 털어놓았고 돌아온 조언은 생각보다 냉철했다.
“퇴사 고민한 지 오래된 거 알고 있어.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된 거지. 이번에 눌러앉으면 아마 너는 너가 해보고 싶었던 다른 일을 찾아볼 기회를 잃을지도 모르고 또 그 프로젝트 PM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버거울 거야. 연봉까지 올려줬으니 분명히 제 몫보다 더 하기를 기대할 텐데 나도 그 프로젝트하며 너무 힘들었고 지금 그 부장님도 나가떨어졌잖아. 그런 일을 니가 니 성질대로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다 보면 지금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중압감이 심할 텐데 괜찮겠어?”
나는 며칠에 걸쳐 부장님의 조언을 곰곰이 곱씹었다. 만약 내가 부장님과 단순히 업무적인 관계였다면 오해도 있었을 것이다.
부장님은 왜 내 퇴사를 말리지 않지?
사실은 그동안 나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잘됐다 싶은 건가?
아니면 내가 일을 잘한다는 건 혼자만의 착각인가?
하지만 M부장님은 그때 나에게는 이미 상사 이상의 관계였다. 멘토이자 인생 선배였고 언니 같은 사람이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나를 위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나는 이사님의 제안을 고사하고 퇴사를 확정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회사 적응기는 말뚝처럼 심지가 탄탄한 그녀 덕분에 8년이나 이어졌다. 사실 그녀도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사람들 표현을 빌면 ‘마이웨이’였다. 귀가 얇은 나와는 다르게 본인의 판단이 늘 기준이었고 확신이 섰다면 남들의 간섭에 흔들리지 않았다. 면전에 대고 직언도 잘해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만 뒤끝 없고 저의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그러면서도 타인에 대한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남들도 저마다의 기준과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단점을 고치려고 하기보다 장점을 찾아 돋보이게 해주는 능력이었다. 감정의 동요도 크지 않아 우리가 호들갑을 떨 때도 덤덤했고 꼭 해야 하는 것도 절대 안 하고 싶은 것도 잘 없는 사람이었다.
“너는 너가 납득이 되어야만 움직이잖아. 그래서 너를 이해시키는 과정은 조금 피곤하지만, 그것만 넘기면 이후로는 너가 알아서 자가발전을 잘 하니까.”
퇴사를 하고 나서 나랑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 나에게 그녀가 해준 대답이다.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추억이었어’ 같은 감상은 없었지만 입에 발린 말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선호하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으니 우리는 실로 긍정적인 시너지의 “T" 커플이었다.
“부장님, 이번 여름휴가 계획 있으세요? 제가 파리 한 달 살기 하기 전에 이탈리아를 다녀올까 하는데 오실래요?”
이 한마디에 계획도 이유도 묻지 않고 쿨하게 “그래” 하고 날아와준 그녀.
회사를 다닐 때도 종종 밖에서 만나던 사이였지만 여행을 함께하는 건 처음이었다. 동료 사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인연이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와는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인연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저 은은한 미소와 조금 부족한 듯한 텐션에 어색함은 잠시, 다시 편안함이 찾아온다.
우리의 여행도 그동안 함께했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설레발과 일희일비를 일삼는 나에게 휘둘리지 않는 그녀의 평정심이 나에게는 안정감이 되고 특별한 목적이 없는 여행에 익숙한 그녀에게 나의 산처럼 쌓인 to do list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 둘에게 처음이었던 함께하는 여행지가 이탈리아라니. 낭만보다 더 좋은 정취가 기대되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