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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떠나지 않으면, 떠날 수 있어

관계를 통해 여행을 배우다

by 바다기린


“떠나지 않는다” 는 것은 제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결심입니다.

여행을 함께 하다 보면 부모님과 남편처럼 떠날 일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관계에서도 새롭게 배우고 이해해야 할 일들이 생깁니다.

가족이 아니어도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남들보다는 특별하고 애정하는 사이겠죠. 그들에게도 종종 실망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그다지 달갑지 않은 면모를 마주했을 때 뒷걸음질 쳐지기도 하지만 특수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여행이 지니고 있는 기회비용 때문에 웬만하면 즐겁게,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결혼하기 전에 한 번쯤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상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는 것에 공감대가 높더라고요. 하지만 일부의 경우에서 여행이 관계를 더욱 단단히 하기보다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여행의 호(好) 기능 일 수 있겠죠. 저 또한 여행지에서 남편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하루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고개가 가로저어지거든요. 그래도 이미 ‘내 사람’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좋았던 것들을 먼저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항상 무거운 짐을 대신 옮겨주고 낯선 곳에서의 운전도 도맡아 하고 피곤해도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따라나서고 했던 배려가 없었다면 즐거웠던 나머지 일정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은 잠시 다녀오는 것이고, 일상을 떠나 기분을 전환하는 이벤트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어떤 이는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실감하지만 어떤 이는 다음번의 이벤트를 기다리며 일상을 견딥니다. 저도 한창 여행을 다닐 때는 여행 자체를 가장 우선시했던 것 같아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늘 마음은 초조하고 계획대로 따라주지 않는 일행들을 탓하는 마음도 쉽게 생겼어요. 하지만 여행이 나에게 남기는 것은 결국 ‘관계에 대한 이해’였어요. 혼자일 때는 나에 대해, 함께일 때는 상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는 순간들이 여행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다 보니 사람의 마음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여행을 망치지 않으려고 상대에게 맞춰주던 순간들이 어느새 상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여행을 맞추어가는 노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특히 부모님과 여행을 하면서 많이 연습했던 것 같아요. 제 아무리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절경 앞에 서 있더라도 이곳을 다시 방문하기까지 걸릴 시간과 부모님과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남은 시간을 저울질해 보면 늘 후자로 추가 기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부모님과 여행을 할 때는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세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여행을 권유하며 남편이 “30대의 네가 느끼는 유럽과 40대에 느끼는 유럽은 분명 많은 부분에서 다를 거야. 나중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다녀와.”라고 했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아요. 저는 30대에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여러 곳을 다니며 오히려 ‘떠나지 않아도 좋을’ 마음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프롤로그를 통해 ‘떠나다 보면, 떠나지 않을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죠.


아직 가보지 않은, 가보고 싶은 곳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여권에 도장을 늘려가며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녀왔는지가 여행의 고수를 가름 짓는 기준이 되던 때에는 남아 있는 곳들에 대한 열망과 이미 가 본 곳들에 대한 향수를 떨쳐내기 위해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행을 하기 위해 돈을 벌고, 여행을 하기 위해 휴가를 아끼고, 여행을 하기 위해 공부하던 시간들이었죠. 그러나 점점 아무 사건 없이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여행의 정취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지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대단한 랜드마크를 가거나 놀라운 음식을 맛볼 때보다는 숙소 앞 카페에서 멍 때리며 커피 마시던 시간, 근처 공원을 조용히 걷던 시간, 숙소에서 현지 식재료로 식사를 만들던 시간이었거든요. 지금도 하루 세끼를 준비하고 식간의 남는 시간에 집 앞 카페에 나와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남편과 동네를 산책하는, 우리가 ’ 일상‘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들이 장소만 다를 뿐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하고 있는 중인 거예요.


저는 그렇게나 좋아하는 유럽을 가지 않은 지 7년째입니다. 물론 그 사이 가까운 일본과 국내 이곳저곳을 심심치 않게 다녔지만 제 기준에서는 그쯤은 별다른 준비 없이도 훌쩍 다녀올 수 있으니 제대로 된 여행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10시간 이상 비행을 하며 기내식도 두 번쯤 먹어주고 일정도 일주일 이상 되어 그 장소에 정이 좀 붙을 수 있어야 비로소 여행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파리가 나왔을 때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어요.


“파리를 7년째 안 가고 있다니, 인생을 허비한 느낌이야.”


그러게요. 저는 아직까지도 도장깨기에서 못 벗어났나 봅니다.

그런 저에게 쓴소리를 백 번 하고도 남았을 남편이 숨을 한 번 들이키고 그러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신기하다.”


그 순간 다시 저는 여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파리에 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서 늘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그 일들이 모두 즐거운 일이라는 데에서 오는 활력감.

일상에서의 책임에서 강제적으로 분리된 자유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

나중에 이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추억팔이를 하며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감.


하지만 이 긍정적인 감정들은 일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들이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파리에 가지 못한 햇수’를 세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파리에 다시 가게 될 해’를 기다리며 지금 내 곁에 있는 하루,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행지에서만큼 충실해 보기로 했어요.


그렇게 나에게 엮인 관계들을 ‘떠나지 않’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행을 ‘떠나는’ 날이 오겠죠.

우리는 멀리 여행을 가지 않았던 일곱 해 동안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직업을 바꾸고, 집을 새로 꾸미고 자산을 더 모았죠.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시간들인데 허비한 느낌이라고 했으니 듣는 남편도 속이 터졌을 거예요. 그럼에도 나에게 여행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잔소리를 참고 겨우 뱉은 말이 ’신기하다‘ 였을 테지요.


연재를 이만 끝내기로 하면서도 잠깐 고민을 했어요.


아직 기록하지 못한 여행지가 많은데 기왕 시작한 거 더 써볼까?

그 에피소드도 재밌는데 써볼까?


그러다가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여행‘을 떠나다 보면 ‘사람’을 떠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걸 상기했어요.

여행지가 아니라 관계에 기준을 두고 글을 쓰기로 했기 때문에 모든 여행지를 언급할 필요는 없었고, 단순히 흥미 위주보다는 나름의 깨달음이나 감상을 담을 수 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기준이 다시 잡히는 계기였습니다. 그 기준에서는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여행을 통해 관계를 배우고’ ‘관계를 통해 여행을 배웠’ 던 저의 기록이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의 일상도 매일이 ‘여행’ 같기를.

그 여행을 함께하고 있는 소중한 이들과 때로는 진짜 여행도 떠나며 재미나게 지내기를.


시간과 돈이 여행의 요건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요건은 ‘사람’ 임을 나만큼 수없이 여행하기 전에 깨닫기를.

그래서 좀 더 효율적이고 만족스러운 여행을 꼭 필요한 때에 반드시 다녀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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