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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떠난 건 아니지만 함께였던 여행_1화

여행지에서 마주친 인연들

by 바다기린


여행메이트는 때로 여행의 동기 그 자체가 될 만큼 여행에 있어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같은 장소여도 누구와 함께이냐에 따라 보는 것도 먹는 것도 기분도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러 번 같은 목적지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을 함께 떠난 일행이 아니어도 여행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이들이 있다. 우연히 그곳에서 마주친 또 다른 여행자, 나에겐 여행지인 곳이 삶의 터전인 현지인, SNS를 통해 내가 머무는 곳의 여행정보를 공유하는 누군가는 지난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로 떠오르기도 하고 몇몇은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곁에 남기도 했다.


오늘은 그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각자의 삶에서 우연히 나와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맞닿았던 그들이 내 여행에 어떤 의미가 되어주었는지 기록하는 것은 여행을 통해 관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이야기를 엮은 이 연재에 꼭 필요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두 화에 걸쳐 기록해 볼 에피소드들 중 이번 글은 여행 이후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순간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었던, 그것만으로도 정말 귀했던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 엄마 아빠가 저렇게 나이 들었음 좋겠어

스트라스부르의 골목


남편과 나는 허니문으로 2주간 파리에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차량으로 하루 안에 다른 지역을 다녀오는 투어를 한 업체를 통해 세 가지 신청해 두었다.


‘베르사이유’ 투어는 다른 투어들처럼 하루 일정을 빼놓아야 하지만 비교적 파리 근교에서 이동하므로 저녁 시간 전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다음날 일정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적으니 부담감이 덜하다. 또한 긴 줄을 서야하는 베르사이유 궁 입장권을 여행사 측에서 미리 끊어두어 편리하다는 메리트가 있고 대중교통으로는 하루에 함께 가기 어려운 ‘지베르니’로 이동해 모네의 집과 정원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고흐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들르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상파 화가 둘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어 인기가 많다.


몽셀미셸’ 투어는 몽셀미셸을 가는 사람이라면 열에 여덟은 선택할 만한 코스다. 가는 길이 기차를 타고 가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다 배차 간격도 엄청 길기 때문에 차량 이동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여기에 간조, 만조 시간도 체크해야 하고 야경을 보려면 하릴없이 1박을 해야 하기에 어찌 보면 야경을 보고 바로 돌아오는 투어상품이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지역이라 인기가 높았다. 가는 길에는 시기에 따라 ‘에트르타’나 ‘옹플뢰흐’를 경유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서쪽 노르망디 지역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알자스’ 투어는 프랑스 동쪽, 스위스와 독일에 접경한 알자스 지역의 주요 관광지인 ’스트라스부르‘와 동화 속 마을 같은 ‘리크위르’, 운하가 예쁜 ‘콜마르’를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그 투어는 우리가 신청한 다른 두 가지 투어보다는 인기가 덜 했는데 이동 시간은 몽셀미셸과 비슷해(차량으로 편도 4~5시간인데 기차로는 3시간) 강행군이면서 한국인에게 관광지로서는 인지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던 2013년에만 해도 그랬는데, 같은 시기에 ’꽃보다 할배‘ 촬영이 있었고 우리가 돌아온 후 방영되었다. 그 여정에서 스위스에 가기 전 들른 기착점으로 스트라스부르가 나오면서 훨씬 유명해졌다. 알자스 투어는 시간 순으로는 세 투어 중 가장 먼저 다녀온 투어였는데 최종적으로 이 투어가 우리에겐 가장 인상 깊게 남았다. 뒤에 두 번의 투어 모두 9인승 차량에 남는 자리 없이 꽉 채워 떠났고 가는 길에는 저리 선점을 잘못해 불편한 보조의자에 앉아 가느라 엉덩이가 아팠다. 무엇보다 긴 시간 함께 이동하는 일행들과의 케미 또한 투어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알찬 코스와 프로페셔널한 가이드들 덕분에 모든 투어는 비용이 아깝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알자스 투어를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함께했던 모두가 마치 처음부터 약속해 함께 떠나온 것처럼 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즐겼기 때문이다. 알자스 투어의 일행은 나와 남편, 여행 작가라던 30대 후반의 여성 분, 70대 노부부, 가이드까지 총 6명이었다. 6월 첫 주, 프랑스의 날씨는 내내 기가 막혔다. 변덕스럽던 봄날씨가 막 지나고 본격적인 여름 날씨가 시작되기 전, 뜨겁지 않은 따끈한 햇살에 간간이 불어오는 미풍까지. 새파란 하늘색은 마치 지중해의 물 색과 같았고 에어컨 없이 창문만 살짝 열고 달려도 기분 좋은 정도였다. 가이드는 30대 초반의 나와 같은 성씨를 가진 청년이었다. ‘한’씨는 전부 서로 먼 친척이라는 아빠의 말 때문에 나는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친근함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였을까, 창밖의 풍경에 감탄할 때마다, ‘한’ 가이드가 브리핑하는 그 지역의 정보에 호응할 때마다 나의 리액션은 평소보다 더 크고 밝았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앉은 푸근한 인상의 어머님은(그때도 ‘아주머니’나 ‘할머니’라고 부르기 싫어서 이렇게 호칭했던 기억이다) 한껏 더 푸근한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이쁜 새댁이 말도 참 재미있게 하네. 둘이 참 보기 좋아.”


이 나이 지긋한 부부는 어찌나 세련되셨는지 젊은 사람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면서도 수다스럽지 않았고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태도 없이 참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보통 이런 조합에서 나이가 한참 많은 어른들은 본인의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우선적인 배려를 은근하게라도 요구하기 마련인데 그런 느낌이 일절 없어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아, 오늘 저분들 모시고 하는 여행이 되겠는데’했던 나의 짐작을 기우로 만들어버리셨다. 덕분에 조수석에 타고 가던 작가 ‘언니’도 나중에는 몸을 돌려 뒷자리에 있는 우리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사교성에 있어서는 나보다는 수줍은 성격인 듯했으나 의리만큼은 다부진 사람인 듯했다. 장거리 운전에 가이드가 졸리기라도 할까 봐 뒤에 남는 자리가 있었음에도 돌아오는 길까지 내내 조수석을 사수했으니. 아버님은 어느 대학 교수님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동글동글 뽀얀 얼굴이 지극히 순한 인상이었다. 베레모를 쓰고 셔츠에 베스트까지 겹쳐 입으신 모습이 영락없이 신사 그 자체였다. 그분이 유일하게 주도적으로 말씀을 이어갔던 순간은 아내가 이미 한 달째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 끝에 내가 ‘그럼 두 분은 파리에 오시기 전에 어디 다녀오셨어요? “라고 물었을 때다.


콜마르까지 연결되는 운하


두 분은 크루즈로 북유럽을 돌고 오셨다고 했다. 노르웨이에서 피오르드를 본 것이 정말 근사한 경험이었다고 우리에게도 나중에 나이 들면 꼭 크루즈로 여행해 보라고 추천하셨다. 하지만 나는 럭셔리한 크루즈 여행에 대한 동경보다 이 긴 기간의 여행을 두 분이 직접 계획하고 이행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존경이 먼저 일었다. 당시의 두 분 보다 10살은 족히 어린(?) 우리 부모님이 단 둘이서 유럽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긴급 상황에 대처할 만큼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글맵이나 어플을 활용할 줄도 모르고 당장 필요한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검색할 수 있는 요령도 없으니 두 분만 달랑 해외에 보내는 것은 어른들 표현을 빌어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는’ 일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두 분도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으셨는데 일정을 맞추기 어려우셨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분이 함께하는 모습에서 나는 주체적으로 본인들만을 위해 꾸린 여행이 얼마나 그들을 생기 넘치게 하는지 종일 목격했다. 느슨하게 맞잡은 두툼한 두 손에서 안온함이 느껴졌고 호기심에 빛나는 두 눈이 마주칠 때 번지던 느긋한 웃음이 멋스러웠다. 부모도 부부이기에, 둘 만의 경험을 나누는 일은 소중하다. 자녀에게 의지하면서 여행은 보다 수월해질지 모르나 그 여행에서 뿌듯함을 느낄 기회는 자녀의 몫까지 입장료나 식사비를 결제할 때 외엔 없기도 하다. 그날 그분들에게는 매 순간이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 앞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의 여유를 즐기고, 리크위르의 독일풍 중세 목조 건물들에 둘러싸인 광장에 있는 식당에서 슈크르트를 맛보며 김치를 그리워하던 입맛을 달랬으며 콜마르의 운하에서 나룻배를 타고, 알자스 지역의 유명한 리슬링 와인을 쇼핑했다. 한 가이드는 짬짬이 ‘레드불’을 마시며 체력과 정신력을 부여잡았고 우리는 그의 추천마다 일제히 엄지 척을 날리며 기운을 북돋았다. 이동 중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 사이에 나는 동생이 파리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고 한 가이드는 동생의 불어실력을 물었다. 별 의도 없이 나눈 대화였는데 그가 갑자기 호의적인 태도로 동생을 가이드로 회사에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한 씨는 다 친척이니까요. 기린님 동생이면 성격도 좋을 것 같고!”


와우. 우리 아빠 얘기가 아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네. 한씨끼리 통하는 보편적 유대감이었네. 그렇게 인연은 이어져 우리가 돌아가고 얼마 후 동생은 그 회사에서 가이드로 일하게 되었다.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여자라 체력적으로도 부족하니 주로 파리 시내 워킹투어를 맡았고 가끔 주변국으로 출장을 가 운전을 맡은 가이드가 쉴 동안 인솔과 안내를 하는 보조 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그 시기에 동생은 부모님의 지원을 거절하며 궁핍했던 시기에 사전 답사를 통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한국어로 일하면서 급여는 전에 하던 아르바이트보다 더 많이 받았으니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맺은 인연이 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으로까지 연결되다니 신기했다. 또한 이로부터 5년 후 동생이 결혼식을 올린 곳이 스트라스부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러모로 스트라스부르는 나로 시작해 동생에게까지 특별한 인연이 되었다.


한 가이드와는 몽셀미셸 투어도 함께했는데 그때는 인원이 더 많기도 했고 대부분의 성향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해 단합된 느낌은 아니었다. 덩달아 알자스투어 때 명랑했던 한 가이드도 차분하게 가이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노부부 두 분과는 투어 후 연락처를 나누고 서로를 찍어준 사진들을 공유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두어 차례 안부를 여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떠올리면 그 완벽했던 하루는 누구 한 명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모두가 서로로 인해 더욱 만족스러운 여행을 했던 행운의 시간이었다. 그런 기회가 매번 오지 않는다는 것도 뒤따른 투어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할 수 없어도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던 피렌체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던 90일의 유럽여행 중 피렌체를 3일 동안 여행할 때 나는 혼자일 때라도 숙박비를 조금 절약해 보고자 한인 민박에 묵었다. 민박집의 주인은 나보다 많아야 5살 정도 차이로 보이는 여자분이었다. 제법 큰 공간을 혼자 관리하느라 힘이 들었던 것인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나를 맞이했던 그녀는 공용공간과 내가 묵을 방을 안내하는 말투에도 나른함이 짙게 묻어있었다. 짐을 풀고 나갈 채비를 하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이따 일정 마치고 연락해 볼래요? 내 친구가 하는 와인샵에 놀러 갈 건데 원하면 그쪽으로 와요.”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계획했던 대로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가서 다비드 상을 직관하고 두오모 성당을 둘러보고 피렌체가 시초라는 젤라또와 티본스테이크까지 먹었다. 날이 너무 더워 나시 원피스를 한 벌 사서 갈아입고 내친김에 이곳저곳 아이쇼핑을 한참 하고 나서도 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9시가 넘어야 겨우 초저녁 느낌이 나던 7월 중순의 피렌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닌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려다 아까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라 카톡을 보내 보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소를 찍어주며 오라고 했다. 와인 판매만 전문으로 하는 작은 가게는 영업이 끝났다는 표시로 셔터를 반쯤 내린 채였으나 불은 켜두었고 그 안에 그녀를 포함해 예닐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매장 가운데 놓인 넓은 매대를 테이블 삼아 빙 둘러 서 있었다.


“어서 와요!”


아까와 다르게 활기차 보이는 그녀가 나를 반겼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의 친구분이 시음해 보라고 건네는 여러 종류의 와인과 곁들임으로 펼쳐 놓은 하몽을 포함한 다양한 핑거푸드를 맛보았다. 죄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나를 여행자로 대하지 않았다. 한국 어디에서 왔냐, 피렌체에는 며칠 머무르냐 정도의 질문 후 그들의 대화는 그들끼리 늘상 나눌법한 주제로 돌아갔다.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조금 뻘쭘했지만 이내 그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여기에서 생활하는 한국사람들끼리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어 오히려 내가 그들을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노란빛 조명들이 울퉁불퉁한 돌 바닥에 굴절되어 마치 물결처럼 보이던 그 길을 걷다 보니 취기가 오르는 듯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느 성당 앞 계단에 잠시 앉았다 가자고 했다.


“나는 이번 달까지만 하고, 접을 거야. 이번 주 예약을 마지막으로 그 뒤는 안 받았어.”

”앗, 그래요..? 왜요?“

“그냥, 힘들어. 아침마다 밥 해 먹이는 것도 힘들고 청소하는 것도 힘들고 예약에 치여서 내 일은 못하고 그 집에 계속 묶여 있는 것도 지겨워.“

“음.. 그럼 그만두고는 뭐 하실 거에요?”

“한국에 가고 싶은데, 가서 할 것도 없고. 여기에서 다른 거 찾아봐야지. 아까 그 친구처럼 가게를 하거나. 아직 모르겠어. 일단 좀 쉬려구.”


그녀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끊임없이 말했다. 이때 내가 느낀 감정은 좀 오묘했는데, 정리해 보자면 그녀의 이런 고민들이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 할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공감이 되면서도 나는 이제 막 피렌체의 정취에 흠뻑 젖어있는데 좀 산통을 깨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생업을 고민하는 사람의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제 아무리 피렌체여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고, 게다가 손님인 나에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고민을 늘어놓다니 재밌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밥은 얻어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렌체의 야경


다행히도 다음날 아침 그녀는 한식으로 식사를 차리고 투숙객들을 불러 모았다. 나 말고도 두 명 정도의 여자 손님들이 있었고 그날 체크인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팀도 두 팀 정도 더 있었다. 왜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그녀와 단둘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고 그녀의 민박이 파리가 날리는 수준은 아니라는 데에 안심했다. 이런 오지랖이라니.

어젯밤 대화로 기분이 조금 다운되었던 기억이라 오늘은 진짜 마지막까지 혼자 보내야지라고 다짐했는데 그날 저녁, 나는 또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노을을 보자며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메시지에서 유추해 보자니 투숙객 모두에게 제안을 한 것 같아 나도 슬쩍 끼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미켈란젤로 언덕의 어마어마한 인파에 대해 미리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 무리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야경이 무르익을 때까지 버티기에는 혼자보다 여럿이 나을 것 같다는 계산도 있었다. 도착해서 그녀를 찾았을 때, 함께 모인 이들은 총 다섯 명이었다. 나와 두 명은 민박집 손님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주인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아마도 40대 중반인듯한 남성이었다. 그때 그분에 대해 소개를 받았는데 지금은 그분의 직업도,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수다를 떨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고 피렌체의 모든 전구가 다 켜질 때까지 충분하게 그곳을 즐겼다. 내려오는 길, 그 남자분의 안내로 올라왔던 계단이 아닌 인적이 보다 드문 반대편 방향으로 향했다. 깊은 숲 속은 아니지만 마치 해운대의 달맞이 길 아래 ‘문텐로드’처럼 메인 도로에서 벗어난 오솔길은 고요하고 깜깜했다.


“여기 종종 반딧불이가 나타나거든. 오늘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일부러 이쪽으로 왔는데 안 보이네. 아, 아쉽네.”


그 말을 듣고 여행자 셋은 반딧불이보다 더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둠을 뒤졌다. 내리막의 끝은 아르노 강변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쪼르르 그와 그녀를 따라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곳은 그로서리샵 겸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테라스가 아르노 강 쪽으로 넓게 빠져 있어 운치가 있었다.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곳인지 용케도 테라스에 빈자리가 남아있어 우리는 불빛이 흐르는 아르노강을 바라보며 그가 추천한 와인을 나누어 마셨다.


“이거 내가 우리 여행자들을 위해 사는 거야. 오늘 나 만난 게 행운이라고. 장소며 와인이며 완벽하지 않아?”


이것만은 확실히 기억하는데,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이런 류의 ‘호스팅’을 유독 즐기는 사람인 듯했다. 그가 베풀었던 약간의 허세와 감사한 호의 덕분에 우리는 현지인들처럼 여유있게 아르노강의 분위기를 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도 나는 민박집주인과 민박집이 아닌 밖에서 함께 있었다. 그날은 만나게 된 경위도 기억이 안 난다. 우리는 피렌체에 있는 한 클럽에 함께 갔다. 어제 함께 야경을 보았던 여학생 둘도 함께였다. 나는 한국에서 한창 어릴 때도 클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30대 중반에 피렌체에서 클럽을 갈 줄이야. 뚝딱거릴 줄밖에 모르는 몸치이지만 점잖은 척 연기하며 어색하지 않을 최소한의 몸짓으로 스테이지(?)에 얼쩡거렸다. 어깨에 카디건을 두른 금발 머리 남자애가 춤을 추며 우리 중 하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애의 패션을 보며 아마 영국에서 온 것 같다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왈츠나 추어야겠다며 키득댔다. 그렇게 사람 구경에 그친 클럽에서 나와 카페에 모여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이 자리를 벗어나면 헤어질 사람들처럼 미련 가득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다 같이 한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날 저녁은 내내 저항 없이 실소가 터졌던 기억이다.


살면서 먹어본 크림 파스타 중 최고


첫날 특유의 글루미한 분위기로 나를 긴장시켰던 민박집주인은 어쩌다 보니 피렌체에서의 3일 내내 나의 나이트 가이드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유쾌한 경험만 하게 해 준. 체크아웃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주인이 제격인 것 같아요. 조금 더 해봐요. 저는 여기 머무는 게 정말 즐거웠어요.”


그 이후로 나는 아직 다시 피렌체를 가지 않았고 오래된 예약 기록은 지워져 그녀가 민박집을 계속하는지 알 길도 없었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한 적은 없지만 이제 찾기 어려운 인연이라 생각하니 그 3일 밤의 기억 안에서만 존재하는 그녀가 피렌체라는 전설 속 정령처럼 느껴진다.



마치 내일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아

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


역시 90일 유럽여행의 마지막 파트였던 파리 한 달 살기의 남은 하루. 다음날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은 특별한 일정을 하기보다 그동안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가장 좋아했던 팔레후아얄 공원에 가고 오페라대로와 에펠탑을 끼고 센 강 변을 거닐다 올 계획이었다.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집을 정리했다. 그리고 동네 단골 카페에 갔다. 거의 매일 아침 이곳에 와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셨었다. 어김없이 테라스 좌석에 앉아 어느덧 선선해진 8월 말 파리의 날씨를 느꼈다. 정들었던 동네 풍경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봉쥬르, 므슈. 쥬 브드헤 엉 캬페, 실부플레.”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리면 웨이터가 “마담”하며 에스프레소를 가져다준다.


“메흐씨.”


할 줄 아는 불어라고는 인사말뿐이지만 여기선 그 외에 다른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외마디 단어가 아닌 흠 없는 한 문장으로 주문하는 나를 보며 불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한 것인지 옆테이블의 아저씨가 말을 붙여왔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아이 캔트 스픽 프랑쎄’라고 말했다. 이로써 다시 고요를 되찾고 내일 내 곁을 떠날 파리에 대한 애도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어 실력이라고 유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들리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더니 본인이 영화 제작사 관계자인데 중국의 유명한 감독을 만났다며 사진을 보여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어졌다. 문득 그동안 내가 이런 카페테라스에서 종종 보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3초면 꿀떡할 수 있는 죄그만 에스프레소 한 잔을 앞에 두고 삼삼오오 모여 끝없이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어쩌면 모두가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 아침, 나는 파리지앵들처럼 우연히 옆에 앉은 동네 주민과 아무 얘기나 이어지는 대로 나누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마치 내일도 여기서 또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것처럼 나는 느긋하게 그 대화를 즐겼다.



오후에는 잠시 숙소로 돌아와 미리 약속해 둔 대로 집주인을 만났다. 그녀는 학교 선생님이고 방학기간 동안 태국에 머무르다 왔다고 했다. 그 집은 그녀가 실제 거주하는 곳이었으므로 숙박사업만을 위해 꾸며둔 곳과 달리 진짜 파리 사람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도 지내는 동안 내 집처럼 청결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이날 아침에도 내일부터 다시 이 집에서 생활할 그녀가 불쾌할 부분이 없도록 꼼꼼히 청소했다.


사실 체크인 하던 날, 이전 손님이 체크아웃한 후 집청소가 예정대로 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암을 했었다. 그때 그녀에게 연락해 당혹감을 표현했고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바로 청소업체를 불러주었다. 그럼에도 이미 너무 더러웠던 모습을 보았던 터라 청소업체가 철수하고 나서도 모든 가구를 앞으로 빼서 숨어있는 먼지 덩어리들을 치우고 물걸레질까지 했었다. ‘이 사람들은 어딜 청소한 거야, 대체. 유럽은 물걸레질은 안 하나?’ 하고 투덜거리면서. 내가 차마 어쩔 수 없는 영역인 오래된 패브릭 소파의 얼룩이 너무 거슬려 며칠은 거기에 앉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하루를 끝내고 돌아오면 그 소파에 털썩 널부러져 한참을 인스타그램과 카톡을 하다 씻으러 가곤 했다. 물론 씻고 난 후엔 절대 앉은 적이 없지만. 아담한 복층구조의 집이었지만 평수에 비해 화장실은 욕조까지 있고 꽤 널찍했다. 작은 주방에는 요리하기에 부족함 없이 집기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텔레비전은 없었지만 커다란 창 밖으로 에펠탑이 보이고 복층 침실 위 비스듬히 경사진 천장에 난 작은 창으로는 구름이 흐르거나 빗방울이 굴렀다. 나는 진심으로 이 집에 정이 들었다.



이날만큼은 내가 집주인인양 조각 케이크를 사 와 커피를 내려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고 있자니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당신 집에서 잊지 못할 시간들을 보냈어.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는 집이라니 정말 환상적이야. 너도 이 집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지? 보통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잖아. 나에게 이곳에서 머물 기회를 줘서 고마워. 나도 돌아가면 내 집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아. “


그녀는 본인의 집을 좋아하고 아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자신도 이 집을 정말 좋아한다면서. 월세는 다소 높은 편이지만 직장과도 가깝고 에어비앤비 숙소로도 인기가 좋아 당분간은 여기 살 생각이라고.


저녁엔 동생이 와서 나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더 이상 동생과 ‘이번 주는 언제 만날래?’라는 약속을 할 수 없었고 ‘내일은 집에 돌아올 때 한인마트에서 컵볶이를 사 와야지’ 같은 계획을 세울 수 없었지만 마음은 내일도 모레도 여기에 있을 것처럼 편안했다. 내가 사랑하는 도시 파리에서 관광이 아닌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한 달은 “평생 잊지 못할 축제처럼 내 곁에 머물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밖에 나의 여행들에서 마주친 다른 인연들을 이 글을 쓰며 함께 상기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웃지 못했을 순간, 보지 못했을 광경, 떠올리지 못했을 생각들이 여행이 끝난 후에도 그들 대신 내 곁에 남았다.


나 역시 누군가의 여행 길목에서 반가운 사람이었길, 여행을 추억할 때 미소로 소환되는 사람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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