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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의 대환장 오사카, 올시댁 여행기

‘우리’ 안에서 찾은 ‘나’의 마음

by 바다기린


이번 추석 연휴는 참 길었다. 안성에 있는 어머님댁에 서 이틀, 양평 친정에서 하루, 총 3박 4일 집을 비웠지만 앞뒤로 3일씩 휴일이 더 있었으니 유부녀로서도 꽤 여유로운 추석이었다. 정신없던 작년 추석을 떠올리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어머님께서 한 번쯤 온 가족이 함께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하신 게 신호탄이 되어 추석 연휴에 나, 남편, 어머님 그리고 형님네 네 식구 해서 총 7명이 함께 오사카로 떠나게 되었다.



모두가 모이는 것부터가 미션

남편과 단 둘이 보냈던 평화로운 시간


나에게는 두 번째 오사카였는데 공교롭게도 지난번 오사카 여행도 시댁 식구와 함께였다. 그때는 남편, 나, 어머님, 아주버님 이렇게 넷이었고 교토의 료칸이 목적이었다. 그래도 남편과 3일 미리 오사카에 도착해 두 분이 도착하시기 전에 우리만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시댁여행’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는 이틀 먼저 오사카에 갔다. 지난번 여행에서 좋았던 곳을 다시 방문하고 궁금했던 새로운 곳을 탐험했다. 아무래도 이 시간이 아니면 우리의 의사대로 목적지를 정하기란 어렵겠다 싶어서였다.


미리 각오도 했고 준비도 했건만 7명이 함께하는 여행은 만만치 않았다. 형님네와 어머님이 함께 오기로 한 날, 남편과 나는 우리만의 자유시간을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식구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하자고 전의를 다지며 아주버님이 예약해 두었다는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했다. 해가 진 저녁 시간이었고, 지하철은 퇴근하는 인파로 복잡했다. 캐리어를 겨우 부여잡고 내린 역은 오사카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주거지역이었다. 구글맵을 보며 더듬더듬 어두운 골목을 찾느라 그랬는지 역에서 꽤 멀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조금 걱정이 되었다. 발목이 안 좋아 많이 걷는 걸 꺼리시는 어머님께 이 정도 거리는 숙소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주버님께서 렌터카를 예약해 두었다는 걸로 보아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은 아예 배제하신 것 같으니 그럼 전철역이 먼 것은 일단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 주변을 살펴보니 도보로 산책할 만한 곳이나 갈 만한 식당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차를 타고 도심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숙소에만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환경이었다. 나와 남편은 일단 오늘 저녁 다 함께 식사를 해결할 곳을 찾아두어야 했다. 숙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이자카야 한 곳이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 조금 더 걸으면 편의점도 있었다. 내일 아침거리는 저기에서 사면될 거 같았다.


일본 가정집을 체험할 수 있었던 숙소


일단 거기까지 정해두고 숙소에 들어섰다. 그곳은 3층 짜리 주택이었는데 한 층의 평수가 10평 남짓 되어 보였다. 1층에는 침실 하나와 간이 세면대가 있었고 변기가 있는 화장실은 2층과 3층에, 샤워시설은 3층에만 있었다. 2층에는 주방과 거실 공간이 있었고 3층에는 방 두 개가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집 안을 스캔하며 머리를 굴렸다. 어머님께서 큰 침대가 있는 1층 방을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문제는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마다 2층까지, 샤워를 하려면 한 층을 더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7명이 순번을 정해 하나뿐인 샤워실을 사용해야 했다. 9월 중순이었고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참 여름 같은 날씨였는데 오사카는 더욱 습하고 더웠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나는 상황에서 매일 샤워는 필수였다. 3층의 방 하나에 우리 짐을 들여놓으려 들어간 순간 후끈한 공기에 흠칫 놀랐다. 아무래도 낮동안 뜨거웠던 햇살에 지붕 바로 아래인 이 방을 가득 메운 열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다. 돈키호테에서 산 초콜릿이 밤 사이 다 녹아버릴 것 같은 정도였다. 방에 딸린 작은 에어컨을 틀어 봤지만 웅웅대는 소리만 요란하고 성능은 영 시원찮았다. 그래도 침대의 구성도 그렇고 서열상으로도 그렇고 우리가 이 방을 쓰는 게 맞았다. 남편과 나는 일단 차례로 샤워부터 하기로 했다. 식구들이 도착해서 씻기 시작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우리라도 미리 씻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은 집을 둘러보는 내내 형은 뭐 이런 곳을 예약했냐며 툴툴거렸다. 우리가 비장하게 다졌던 전의는 금세 상실되어 버렸다.


저녁시간은 훌쩍 지나 이미 9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어머님과 형님네가 탄 비행기가 두 시간 연착이 된 데다가 공항에서 렌터카를 인수해서 오느라 우리가 다 함께 모인 시간은 그로부터 40분이나 더 지나서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후발대의 모습을 보자 남편과 나의 피곤은 호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까 알아봐 둔 이자카야가 12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안내를 했는데 동네 선술집이다 보니 지금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을 끝으로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이가 조금 있는 주인아주머니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부터 메뉴 선정까지 모두 아주버님께 의지해야 했다. 7명이 한 번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도 없어 형님네 식구 따로, 어머님과 나와 남편 따로 두 테이블에 떨어져 앉아 제대로 시킨 것인지 모를 메뉴들을 기다렸다. 어머님께서 그나마 드실만한 것들은 요청하는 것 족족 재료 소진으로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고 겨우 주문한 것이 불고기 전골처럼 생긴 나베였다. 김치가 들어있는 것이 신기하고 반가우면서도 의외의 조합이라 미심쩍었는데 역시나 들큰한 국물에 달달한 김치는 한국인 입맛이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배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와 제대로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다 함께 모인 테이블의 논제는 ‘이 숙소에 3일을 머물 수 있느냐’가 되었다.


어머님은 티비를 보다가 잠드는 습관이 있는데 이 집에는 티비도 화장실도 2층에 있으니 소파 앞에 대충 이불을 펴고 자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일본까지 여행 와서 이 무슨 쪽방 신세냐며 아주버님께 일침을 날리셨다. 아마 아주버님도 온 식구가 모여 도란도란 저녁 시간을 보내려는 그림을 그리며 찾고 찾은 숙소일 텐데, 호텔을 잡으면 최소 방 세 개는 잡아야 할 테니 비용도 고려해 결정한 것일 텐데 어머님의 컴플레인이 거세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에 남편도 숟가락을 얹었다. 여기 구조가 너무 불편하다, 화장실이 부족하다, 전철역이 멀다 하면서 어머님을 두둔했다. 나도 속마음은 이쪽에 가까웠지만 아주버님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기에 어머님을 달랬다.


“어머님, 그래도 이런 기회 아님 언제 또 이렇게 다 같이 한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겠어요. 기왕 아주버님께서 고민해서 마련한 곳이니 우리 즐겁게 지내다 가요.”


그제야 큰 아들의 노고가 눈에 들어왔는지 아님 작은 며느리의 충언이 통했는지 어머님께서 기세를 꺾으셨고 긴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우리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하면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지하철 역이 꽤 멀다고 생각했는데 한산한 동네의 밤은 더욱 고요했고 이 역에서는 지상으로 통과하는 지하철의 진동과 소음은 생각보다 크게 들려왔다. 아까 제 역할을 못한다고 생각했던 에어컨은 침대 바로 머리맡에 붙어있어 남편이 연신 기침을 했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끄면 바로 훈풍이 느껴졌다. 이렇게 이틀밤을 더 자는 건 예민한 남편과 불편한 어머님께 고역이지 싶었다. 나 역시 가족과의 여행에서 한 번씩 마트라도 혼자 다녀와야 숨구멍이 트이는데 밖에 나가서 갈 곳이 없는 이곳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침이 되자마자 어머님께 조심스럽게 숙소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냐고 여쭸다. 어머님은 내심 반가워하시는 눈치였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낫겠지?”


동의와도 같은 그 대답을 듣고 곧장 아주버님께 ‘분가’를 요청드렸다. 아주버님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호텔을 검색했다. 주말 숙박이라 그런지 도심의 호텔은 만실인 곳이 많았고 방이 남아있는 곳은 평일 숙박료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걸 보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전날 저녁부터 어머님께 시달린 아주버님은 망설임 없이 예약 버튼을 클릭했다.


모두가 즐거운 것도 미션

어머님과 함께 즐긴 맥주타임


그렇게 어머님과 우리 부부는 다시 오사카 도심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동선도 우리는 쇼핑몰로, 형님네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수족관으로 나뉘었다. 그래도 다 함께 일정 하나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게 화근이었다. 토요일 저녁이었고 우메다였고 예약 없이 7명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은 찾기 어려웠다. 식구를 통틀어 ‘계획형 여행’을 하는 사람은 나와 아주버님 뿐이라 각 팀의 책임자가 되어 서로 마땅한 식당을 서치 해가며 접선지를 맞춰갔다. 우리의 숙소에서 형님네 식구가 주차한 곳까지 다섯 블록 남짓한 거리를 좁혀가며 직접 식당에 들어가 인원수를 대고 자리가 있는지 확인한 후 돌아 나오길 몇 차례, 아주버님이 찾아낸 회전초밥집으로 최종 낙점되기까지 어머님은 우리에게는 짧은 그 길을 헤매며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발은 아프고, 언제까지 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불편과 불만이 되었다. 비로소 식당 앞에서 만났지만 웨이팅을 해야 했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으로는 늦은 때였다. 웨이팅 고객을 위한 빈 의자는 세 자리. 어머님이 앉고 남은 자리는 수족관을 돌아보느라 힘들었다던 조카 둘이 차지했다. 중3, 중1 남자아이 둘은 삼촌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지 못했는지 그저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남편은 성격 급한 어머님의 보챔을 견디며 진땀을 빼고 식당을 찾아 헤맸던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모르는 조카들의 무신경함, 그런 자녀의 배고픔과 지루함에 초조해하는 형네 부부에 대한 답답함으로 짜증이 났던 듯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머님의 제안과 그걸 거절하지 못한 아주버님, 본인 두 아들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도 못했다.


안타깝게도, 회전초밥집의 좌석은 최대 6명이 겨우 구겨 앉을 수 있는 정도라 우리는 그곳에서도 두 테이블로 나눠 앉아야 했고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모두가’함께 하는 식사는 이번에도 불발된 것이다. 그럼에도 형님네는 3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주차비로 9만 원 가까운 비용을 냈기 때문에(일본의 공영주차장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와 남편은 이 회동의 의의를 따질 형편이 못 되었다. 어머님은 식사 내내 양쪽 테이블을 오가며 주최자로서의 책임을 다 하려 애쓰셨다. 명색이 명절에 떠나온 가족 해외여행이니 식구 모두에게 용돈봉투까지 챙겨주시며 분위기를 돋으려고 동분서주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자리에서 만족스러운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아무래도 7명이라는 인원이 무엇이든 함께 하기에 오사카라는 도시는 너무 번잡했다.


인상적이었던 나카노시마 미술관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던 다음날, 그날은 아주버님이 박사 과정을 수료했던 오사카대학을 견학 가는 일정이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다닌 학교를 보여주고 그 시절 이곳에서 태어난 첫째에게 부모의 신혼집을 보여주고 싶다는 아주버님의 바람 때문이었다. 어머님도 아주버님의 유학 기간 동안 형편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시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아 이참에 둘러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자유시간을 요청했다. 어차피 식사도 아주버님의 추억이 깃든 식당에서 할 예정이었기에 갈만한 곳을 찾아 안내하던 내 주 역할이 필요 없는 일정이기도 했고 온전히 ‘김 씨 일가’의 시간을 보내기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날의 통솔자인 아주버님도 가족의 추억여행에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내가 끼면 더 신경이 쓰이실 테니까. 또한 아주 간절히 쉴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틀 내내 어머님의 컨디션, 남편의 기분, 아주버님의 애씀을 지켜보며 조금 벅찼달까. 남편은 내 입장을 이해한다며 그런데 자기도 형의 일정에 흥미가 없으니 나와 함께 다니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이번에 함께 가지 않으면 어머님께서 나중에 두고두고 오빠도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실 게 뻔하니 그냥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다, 솔직히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오전 일찍,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나카노시마 미술관으로 향했다. 마침 진행 중인 전시도 흥미로웠다. 인상파-야수파 시기의 서양회화와 동시대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나라만큼 인상파 작품을 좋아하는 일본에서, 자국의 작가들의 작품과 어떤 방식으로 함께 배치를 했을지, 이들의 전시 구성과 해석은 어떤 방식인지 보고 싶었다.


혼자 있으니 더욱 찬찬히 그림들에 몰입할 수 있었다. 전시의 끝에, 일본 작가의 영상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부부의 소통’을 주제로 한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무렵 남편이 나에게 잘해주어도 결국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는 의구심에 휩싸여 있을 때여서 그런지 괜히 울컥해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사실 나는 이 대가족 여행 자체가 다소 피로하긴 해도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머님이 원하셨던 여행이고 그걸 형님네와 함께 해드릴 수 있으니 나는 노력과 비용을 분담하면서 이루어드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힘들었던 건, 유독 남편과 많이 부딪혔던 그 해의 시간들 속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덮어둔 감정들을 컨트롤하며 평온한 척, 아무 고민과 어려움이 없는 행복한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이 여행에 함께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10년 이상을 함께 산 부부였고, 행복의 관성으로 불만과 불안을 치어 가며 뺑소니처럼 비겁하게 갈등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여행 내내 어머님과 밀접하게 시간을 보낼수록 왠지 모를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아주버님을 대할 때는 여행을 떠나오기 불과 두 달여 전, 아주버님께 힘겹게 내 마음에 대해 토로했던 고해 같던 그 시간이 떠올라 아팠다. 하지만 이 여행을 망칠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었기에 나는 더 밝게, 더 힘차게 일행에 따랐고 때론 이끌었다.


그렇게 미술관에서 숨겨온 감정을 눈물로 쏟아내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미술관 앞에 있는 소품샵 겸 카페에 들어가 식사 메뉴를 훑어보았다. 일본식 가정식 몇 가지 가운데 쌀국수가 있어 주문했는데 지금껏 먹어본 쌀국수 중 손에 꼽게 맛있었다. 따뜻한 기운으로 속을 채우고 나니 다시 힘이 솟았다. 장소를 이동해 원두가 유명한 대형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고 원두를 샀다. 근처에 있는 빵집에서 맛있어 보이는 빵도 조금 사고 우메다에서는 구하지 못한 꼼데가르송 카디건을 사러 미나미센바에 갔다.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해 어머님께 어울릴만한 것도 하나 골랐다. 저녁은 어제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미리 예약해 둔 스시집에서 다들 모이기로 했다. 해가 넘어가며 한낮의 열기가 식어 걸을만해져서 일부러 몇 정거장을 걸었다. 공원을 지나고 강을 건너며 주머니에서 빵을 뜯어 길에 뿌리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마음의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비워내었다. 그들처럼 나도 그 잔해들을 찾아 돌아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이번에는 온 식구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우리가 기대했던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앉아서도 자기 아이들만 챙기느라 자신에게 무관심한 큰아들을 보며 어머님께서 조금 서운해하시는 듯했다. 나는 자녀가 있는 친구들이 많아 형님네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어머님께는 죄송하지만 어머님은 손주들과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 타이밍은 작은 며느리가 나설 차례였다. 어머님께 아까 산 카디건을 건네고 그날이 생일이었던 형님에게는 혼자 쇼핑몰을 돌며 겨우 고른 머리띠와 귀걸이를 건넸다.


“아들도 안 챙겨주는 추석 선물을 며느리가 챙겨주네~?”


어머님께서 큰 아들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소리도 초밥에 고추냉이 빼달라는 요청을 빼먹은 아빠에게 삐진 큰 아들 때문에 진땀을 빼는 아주버님에겐 닿지 않았다. 오늘은 이 집이나 저 집이나 큰 아들들이 문제구만. 내 눈에는 형님의 생일을 챙기는 게 나 뿐이라는 것도 어머님의 서운함 만큼이나 크게 보였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열외의 시간을 보낸 나는 여기에서도 열외를 고수할 수밖에. 어쨌거나 모두는 표면상으로는 대가족 통합의 식사시간을 무사히 보냈다. 그렇게 우리의 오사카여행은 마무리되었다.


이 여행의 진짜 미션은 ‘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어머님과 아주버님께 긴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이 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에 대한 꿉꿉한 속내를 숨기고 시댁 식구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웠던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복잡한 추석에 굳이 가족 모두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신 어머님에 대한 불만에 덧씌워 아주버님께 볼멘소리를 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에 가까웠다. 이 마음을 끝내 모르셨던 어머님께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아주버님께도 괜스레 죄송스러웠다.


어머님, 우당탕탕 가족여행이었지만 지나 놓고 보니 힘든 기억보다 즐거웠던 순간들이 먼저 떠오르네요. 모든 여행이 그렇듯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았던 기억만 남겠죠. 저희가 모든 경비를 다 내고 모시고 다녀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머님 덕분에 금전적인 부담 없이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아무래도 모든 건 내 맘 같지 않은 거다 보니 함께 다니며 서운하신 점이나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머님께서도 좋았던 기억만 남기시길 바라요. 어머님 발이 불편해 더 많이 다양하게 다니지 못한 게 아쉬워서 좀 더 일찍 이런 시간 많이 가졌을 걸 싶었답니다. 그것도 어찌 보면 제 욕심이겠죠?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즐겼다고 생각하려고요! 어머님께서 저 배려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마음 듬뿍 느실 수 있는 시간들이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남은 연휴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 사랑해, 이쁜 우리 막내 며느님~~ ^^(하트)


아주버님, 여행 내내 가족들이랑 어머님 양쪽 다 케어하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가기 전에는 저도 불평했지만, 막상 다녀오니 제가 느끼는 불편과 서운함은 물론 입장차이는 있겠으나 아주버님에 비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숙소를 옮기게 된 것도 죄송스럽구요... ㅎㅎ 저는 생각이 복잡한 와중에 함께하게 된 여행이지만 어쨌든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머님, 그리고 아주버님, 형님에 대한 애정으로 따뜻했던 순간이 더 많았던 여행이었습니다. 신경 쓸 사람이 많아 늘 버거우실 텐데 그래도 저는 알아요. 그 또한 아주버님의 의지이고 기쁨이라는 걸. 저도 저희 가족한테 그렇거든요. 최선을 다 하셨음에도 가족들이나 어머님께서 아주버님께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때는 아주버님도 기운 빠지시겠지만 저는 아주버님 입장을 알아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아주버님께 제 마음을 털어놓고 나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또한 이번 여행에서 뒤죽박죽 모두가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 각자의 입장에서 힘듦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구요, 오히려 어머님께서 좋아하셨던 모습들이 더 기억에 남네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남은 연휴 가족들과 오붓하게 행복하게 보내세요.


- 그래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추억이 되는 거겠지요. 첫날부터 비행기부터 컴플레인까지 몰려와 멘붕이었어서 모두에게 짜증 낸 것 같아 이제 와서 미안하네요. 시간이 흘러서 즐거운 기억만 남기를 바랍니다. 결국 애들도 할머니도 아무도 만족 못하는 여행이란 걸 할머니도 깨달으신 것 같아서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구요.


아주버님의 말씀대로 어머님은 이제 그렇게 다 함께 하는 여행은 당분간 없어도 될 것 같다고 선언하셨다. 그것은 아주버님과 남편에게 있어 오사카 여행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다른 것이 남았다. 그것은 나에게 여전히 ‘남편을 위하는 마음’이 우선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가족 여행이 두고두고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은 힘든 기억이 지배적일지라도 훗날 떠올렸을 때 ‘그러려니’하고 넘길 수 있을 법한 어머님의 불평이나 형의 짜증 외에 ‘아내의 번뇌’는 기억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결국 나는 오사카의 길거리에 흩뿌렸던 마음의 부스러기들이 고스란히 소환되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시시때때로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스러기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 것 같다. 아직 소각장에 보내지는 못했지만 종량제 봉투에 단단히 밀봉해 남편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숨겨두었다. 언젠가 때가 오면 그 봉지에 불을 붙여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봉지가 남편에게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한다. 만약 남편이 ‘나도 사실은 모아뒀어’라며 그걸 내민다면, 내가 먼저 그의 앙금을 활활 태워줄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온 가족이 모였던 그 여행에서 나는 내 마음이 향할 곳을 찾았다. 혼자 이탈해서 보냈던 하루는 그 방향으로 나를 조향하는 이정표 중 하나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다음번 언젠가의 연재는 그 이정표를 따라 지금에 이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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