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독자적인 나와 그녀의 인연
시어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을 아주 짧게 기억한다.
아직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던 때, 강남역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와 만나기 전 남편은 서울에 볼일이 있어 나오신 어머니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꽤 인기 있었던 뷔페식 패밀리 레스토랑 '빕스'에 가는 바람에 식사 시간은 길어졌고 나는 웬일로 약속 시간보다 먼저 강남역에 도착해 버렸다.
"나 아직 엄마랑 식사 중인데, 여기로 올래?"
어차피 오빠를 만나면 커피를 마시러 갈 거라서 미리 어디 가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던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하고 빕스로 향했다. 넉살 좋은 편인 나는 어른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아직 남자친구의 어머니를 '예비 시어머니'로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 그냥 빕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메뉴만 한 두 가지 덜어와서 공짜로 먹고 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갔다. 그날 어머님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빕스를 나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은 기억은 단지 어머님 얼굴이 오빠랑 닮은 데가 있는지 잠시 살폈던 순간, 날렵한 바지정장을 한 세트로 입으신 모습에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으신 분이구나 생각했던 순간 정도이다.
털레털레 와서는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밝게 인사하고 제 것인 양 본인 아들 접시를 들고 음식을 가져다 열심히 먹는 말간 여자애를 어머님은 어떻게 보셨던 것일까. 훗날 상견례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얘가 제 식구가 되려고 그랬는지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더라구요."
애석하게도 그 멘트로 우리 아빠한테 반감을 사셨지만 말이다. 아빠는 집에 와서 그랬다.
"내가 아직 보낸다고도 안 했는데 본인 식구라고... 눈앞에서 코 베이듯 딸 뺏기는 기분이더라."
그 말을 듣고도 별로 억울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상견례가 끝난 후 내가 어머님께 참지 않고 한 마디 던졌기 때문이었다.
어색하고 불편했던 그 자리가 끝나자마자 엄마 아빠는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상견례 장소는 강남역이었기 때문에 잠실에서 가까웠다. 반면 어머님은 평택에서부터 올라오신 거였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커피 한 잔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상견례 끝나고 바로 엄마 아빠를 따라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이 실수였나 싶다. 두 분도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 마음이 그때도 조금 들었던 것일까, 어머님이 친근하게 내 팔을 잡으며 농담처럼 “너희 엄마가 저러시니 내가 너무 불편하더라”하시는데(어머님은 상견례 자리에 20분을 늦으셨고, 엄마는 어머님께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목이 메던 그날의 일화는 다음번에 자세히) 그걸 또 실실 웃으며 받아쳤다.
“어머님, 지금 저한테 저희 엄마 흉보시는 거예요?”
반쪽짜리 부모가 아니라
둘 보다 든든한 한쪽 부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님이 나를 예쁘게 봐주신 건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머님은 나를 예뻐해 주신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나는 처음부터 어머님이 지금처럼 좋았던 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생각해 오던 시어머니의 모습과 부합하는 게 하나도 없었기에 아쉬웠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내가 바랐던 시부모님의 모습은 우리 집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여유 있는 형편에 우리 부모보다 조금 더 너그럽고 우리 부모만큼 사이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일단 어머님은 혼자였다. 연애 초기에 남편에게 들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홀 시어머니'가 생기는 거였고 더구나 내 남편은 '다정한 아들'이었다. 가까운 친구 중에서도 이혼가정이 없었으니 나로서는 처음 겪는 가족의 형태였다.
남편이 대학생일 때 어머님은 아버님과 이혼을 하셨다. 아버님은 이것저것 사업을 하셨었는데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빚을 지기에 이르렀는데 나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차압딱지를 남편은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했다. 한 번은 학교에 있는데 어머님으로부터 이쪽으로 하교하라면서 처음 보는 주소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집이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해운대 바다가 내려다보이던 달맞이의 널찍한 고급 멘션에서 허름하고 오래된 작은 아파트로 간 그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업을 빙자한 '돈 사고'를 벌일 때마다 어머님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빚을 갚고 또다시 집안을 일으켰다. 그러면 아버지가 다시 그 돈을 홀랑 증발시키기를 여러 차례. 그렇게 어머님도 결국 아버님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이혼이 결정되던 날, 법원에서 마지막으로 뵌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며 남편은 치를 떨었다. 덤덤하게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으며 남편에게 '고생했다' 한 마디 했다며. 이후로 남편은 단 한 번도 아버님에게 연락을 드리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버님의 얼굴도, 성함도 모른다. 사진 한 장이라도 보여달라고 부탁했었지만 도망치듯 이사를 가며 본인의 어릴 적 사진도 거의 다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에게는 상상 속의 인물 같은 분이지만 남편의 이야기만 듣고 나까지 아버님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해보니 이혼이라는 건, 때로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결정하게 될 수도 있고 한쪽이 완벽히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인 상황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짐작건대 아버님의 무능함은 어머님의 대쪽 같은 성향에 의해 더욱 부각되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두 분의 이혼 스토리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은 절반에 이르기에 나는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남편을 위해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오빠, 그래도 아버님을 그렇게 오래 미워하지는 마. 나는 오빠가 누군가를 그렇게 열심히 미워하며 살지 않았음 좋겠어."
이후로 남편은 그래도 아주 가끔 아버님 이야기가 나올 때 예전처럼 인상을 찌푸리거나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만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키워 온 남편에게 '엄마'라는 키워드는 눈물 치트키였다. 남편과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우리가 노부부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울었다고 했더니 남편은 어머님이 나이 드셨을 때 혼자인 모습을 떠올리며 울었다고 했다.
우리는 결혼준비를 하면서 양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당시 어머님은 새롭게 시작하신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형편이 어려우셨고(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 집에서는 시댁에서 아무것도 못해주면 우리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남편이 신혼집을 마련하려고 아등바등할 때 어머님은 금전적으로 아무런 지원도 해주실 수가 없었다. 결혼반지를 맞추러 가는 길에 남편이 어머님과 통화를 하길래 내심 기대를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예쁜 거 잘 고르고 와라" 뿐이었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금가락지 하나 못 받고 결혼하는구나, 허탈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어머님은 세금 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었다고 한다. 그걸 까맣게 몰랐던 그 시절의 우리 둘은 참 해맑았다. 도움 없이도 남들이 하는 결혼준비는 어느 정도 번듯하게 모양새를 갖출 수 있음에 스스로 대견해하며 설렜었다. 사실 우리 부모는 당장 서울에 전셋집 정도는 무리 없이 해줄 수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도, 패물도 받은 것 없이 남자 하나 좋다고 시집가겠다고 하는 마당에 그런 지원을 뻔뻔하게 요구할 수도 없었다. 우리 엄마는 혼수를 채우는 것도 우리가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하겠다고 했다. 겉으로는 '준비할 시간이 없다'라는 핑계를 댔지만 그 집에 결혼 한 달 전부터 미리 들어가 살고 있는 남편이 새 가구를 나보다 먼저 쓰는 게 싫어서였다. 남편은 텅 빈 집에 침낭을 펼치고 잠을 잤고 냉장고도 없어 실온에 보관이 가능한 레트르토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어머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때는 엄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데만 급급했지만 지나 놓고 보니 아들을 통해서라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신 어머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양가 부모님은 결혼식날 이후 13년째 한 번도 만나신 적이 없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특이하다고 하겠지만 우리에겐 더없이 편안한 상태다. 만나지는 않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기도 한다. 본인의 아들에게, 딸에게 대하는 여러 모습들을 전해 듣고 처음보다 더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있다. 남편의 어머님에 대한 애틋함을 유난스럽다고 말했지만 나 역시 제부 니꼴라의 표현대로 '티피컬한 코리안'이라서 K장녀 그 자체다. 남편 앞에서는 엄마 흉을 봤지만 마음속으로는 엄마 편일 때가 많았다. 결혼하고 몇 해 동안 어머님의 연락에 회신도 하지 않고 남편에게도 마음을 다 열지 않았던 엄마에게 서운하면서도 그걸 내가 미안해하는 순간 밑지는 기분이 들까 봐 내색하지 않았다.
부족해도 만족스러운,
우리는 가족
결혼하고 몇 해를 보낸 어느 추석 명절, 여느 때처럼 어머님 댁에는 지인들이 보낸 선물들이 쌓여있었다. 호탕하고 의리 있는 어머님은 인덕이 두터워 주변에 챙겨 주는 분들이 많다. 그 배 박스도 그중 하나겠거니 했다. 마침 형님이 주방에 와서 어머님께 말했다.
"어머님~ 이거 저희 엄마가 어머님 드리라고 보내주셨어요."
"아유, 사돈은 매번 이렇게 챙겨주시고. 감사하다고 꼭 전해드려라."
"네에~!"
이 대화를 들으며 문득 자각했다. 우리 엄마는 그때까지 한 번도, 어머님께 선물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는 내 입에서 눌러두었던 그 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내뱉으면서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도 모르게.
"... 어머님... 죄송해요."
주어도 목적어도 일절 없는 대뜸 어린 고백에 어머님은 바로 대답하셨다.
"ㅇㅇ아, 이건 어른들의 문제야. 네가 죄송해할 필요가 전혀 없어. 그리고 나는 괜찮아! 절대 신경 쓰지 말어라."
그 한 마디가.
그동안 어머님한테 살랑거리면서도 마음속으로 고개 빳빳하게 세우고 지내던 콧대 높은 며느리의 기를 팍 꺾어놓았다. 딸 같은 아들을 흔쾌히 주시면서도 내가 두려워했던 모습의 홀시어머니들처럼 '아들 뺏어간 계집애' 같은 원망 없이 오히려 나를 또 다른 가족으로 첫 만남에서부터 받아들이셨던 어머님께, 나는 손해 보면서 당신 아들 하나 보고 시집왔다고, 받은 것도 없는데 혼수는 해오지 않았냐며 몰래 생색 주머니를 하나 차고 있었던 철없는 며느리. 그래봤자 남들 하는 정도의 혼수 채워 놓은 건데 그마저도 아들 먼저 못 쓰게 했던 사돈.
이후로도 내가 무방비일 때 어머님의 깊은 이해심과 애정은 훅 치고 들어왔다. 언젠가 대화의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님은 주방에서 김치를 썰고 계셨고 나는 옆에 서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추석 때의 나처럼 말을 흘리셨다.
"너희 결혼할 때 내가 아무것도 못 해줘서.."
그때 나도 어머님처럼 마음을 탁. 하고 놓을 수 있는 어떤 대답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 입장에서 '괜찮아요'하는 것은 내가 아량을 베푸는 입장처럼 보일까 봐 망설여졌고 '충분히 해주셨어요'라는 말은 내키지 않아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도 또 나만 보상받고 말았다. 어머님도 스스로 우리 결혼할 때 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구나. 그럼 되었다, 이렇게. 못된 며느리는 혼자서만 계속 마음의 빚을 탕감하고 있었다.
몇 년이 더 지나고 어머님의 사업이 점차 안정화되면서 지금은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넉넉하게 지내고 계신다. 함께 여행을 갈 때면 어머님께서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하시고 얼마 전 형님네와 우리에게 새 차도 마련해 주셨다. 예전의 나라면 환산된 돈으로만 그 가치를 판단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게 설령 본인의 아들들을 위한 것이고 옆에 있는 나는 덤으로 받는 것일지라도 어머님께서 예전보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상태가 되신 것만으로도 기쁘다.
물론 우리 어머님도 여느 시어머니처럼 '아, 역시 내 남편의 엄마구나' 싶을 때가 있다. 아들 둘만 키웠던 엄마로서 '누군가의 딸'에 대한 적절한 태도나 말을 헤아리지 못하시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우리 엄마는 딸만 둘 키웠던 엄마로서 학습된 사려 깊음이 있다. 일례로 나는 양가에서 한 번씩 육쪽마늘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시어머니는 정말 땅에서 뽑은 모양 그대로 통마늘 한 단을 보내주셨고 우리 엄마는 마늘 하나하나 빻아서 톡톡 잘라 쓸 수 있게끔 큐브 모양으로 냉동해 보내주었다. 내가 친정에 며칠 가 있으면 엄마는 김서방 걱정을 하며 내 등을 떠밀지만 남편이 어머님댁에 가 있으면 어머님은 은근 아들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그러한 친정과 시댁의 온도차가 내심 불편했었다. 때로는, 어머님이 며느리에게 아들 양육을 떠넘기고 보고 싶을 때마다 보는 편리한 관계를 누리시는 거 아닌가 하는 비약을 하며 괜히 골이 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뜻밖에 어머님의 마음을 엿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온전히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돈 문제로 아내를 걱정시키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다.”
“남편도 늘 아내에게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 지루한 배우자가 되면 안 된다. 늘 단정한 모습으로 다정한 모습으로 아내를 대해야 한다.”
어머님은 본인이 남편에게 받아보지 못한 대우를 아들에게 대신 요구하시는 것보다, 아들이 아내에게 본인 남편과 같은 과오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 아들 역시 남편은 처음이라 늘 완벽하진 않았다. 유독 싸움이 잦았던 해, 어머님께 당신의 아들이 당신 생각만큼 괜찮은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던 적도 있다. 요즘 이혼 프로그램이 왜 이렇게 많냐고 그렇게 싸우면서 함께 사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님께 여쭤보았다.
“어머님은 저희 둘이 이혼하면 그래도 오빠 편 드실 거죠?”
그 말속에는 당신 며느리도 ‘이혼’이라는 걸 상상해본 적이 있다는 은연이 담겨 있었다. 그걸 눈치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의 대답은 그랬다.
“아니. 이혼은 한 사람의 잘못만으로 되지 않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그건 전적으로 너희들 문제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
그 짧은 순간, 어머님은 반사적으로 중립을 선택하셨다. 그 대답의 속도와 내용을 통해 나는 어머님이 무조건 적으로 아들 편을 드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추석, 시댁 식구 다 함께 오사카 여행을 갔을 때였다. 일정 중 형님네 식구는 따로 시간을 보내고 어머님, 남편과 셋이서 낮맥을 즐기던 시간이 참 즐거웠었다. 그때 남편이 술도 한 잔 했겠다 기분이 한껏 들떠서 수다를 떨다가 잠깐 화장실을 간 새에 어머님이 혀를 차며 “어휴 참 저렇게 좋을까”하시길래 나도 모르게 “싫은 것도 참 저렇게 싫어한답니다” 했더니 어머님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안다 안다 쟤 성격, 쉽지 않지”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결심했던 것 같다. 우리가 치열하게 싸웠던 것도, 내가 이 관계에 대해 번뇌했던 것도 어머님은 모르시게 해야겠다. 구체적인 예시나 직접적인 불평은 절대 하지 않겠다. 어머님께 일러봤자 아들 편일 것 같아서가 아니다. 아들에 대해 실망하시고 상처받으실까 봐. 왜냐하면 어느덧 나에게 어머님은 단순히 남편의 엄마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밉다는 이유로 어머님을 괴롭힐 수는 없었다. 묘하게도 어머님에 대해 탐색하던 신혼 시기에는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덩달아 어머님을 이해하려는 동기가 되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어머님이 좋아지자 이번에는 그 애정이 남편에 대한 내 마음을 보호했다. 13년의 결혼 생활은 서로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동시에 그걸 다시 정상 궤도로 끌어올릴 힘도 가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어머님이 그 장력의 일부임에는 분명하다. 이미 남편을 분리하고 온전히 나와 어머님 둘 사이의 라포가 나도 모르는 새에 자라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님은 남편이 나에게 준 선물 같은 인연이다. 그 인연은 내가 친부모에게 느끼는 것과 같이 때로는 이해가 안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깊은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그야말로 ‘가족’인 것이다.
글이 더없이 길어질까 봐 양가의 관계에서 우리 부모의 입장이나 노력은 충분히 풀어내지 못했다. 그 또한 나중에 소명할 글을 써볼 생각이다. 어쩌면 부부의 결혼생활은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각자의 부모 역시 조력하는 정교한 협상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속 깊은 배려일 수도 혹은 어느 정도의 무신경함일 수도 있는 어머님의 처신으로 나름의 안전기지를 만들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서 언젠가 어머님의 품이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품을 파고들면서 어머님을 벨까 봐 두려워서 나는 그 안전기지를 최후의 보루로 삼는다. 설령 결정적일 때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할지라도 원가족이 아닌 바깥에, 나만의 안전기지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어머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라 인사처럼 쉽게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머님께 수없이 들었던 말,
“사랑해”
나는 한 번도 같은 말을 돌려드린 적이 없다. 낯 간지럽기도 하거니와 우리 부모, 동생, 남편이 아닌 다른 이에게 한 마디도 나눠주기 싫은 단어라서 아직도 그 말은 쉽게 할 수 없지만 근사한 정량의 감정으로 다른 말을 떠올린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