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손으로 외친다
tvN에서 방영하는 <알쓸별잡>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모두가 쓰고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라고. 내 글을 읽는 건 아마 AI밖에 없을 거라고. 누군가한테 ‘재주’라고 말할 만한 게 글뿐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애석한 이야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글이라는 게 재주가 있는 사람이 그 재주를 기록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못해 본 경험을 하거나 뛰어난 지식이 있어서 그것을 공유하는 게 응당 사회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하는 것. 그래서 나는 그냥 나 혼자만의 ‘별일별잡’ 같은 이야기들을 일기처럼 적어둔 이 브런치에 큰 애정을 갖지 않았다. 만약 내가 작심하고 글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소설이나 극본이 아닐까 상상했다. 그런 미상의 세계에서는 작가의 배경이나 출신보다 스토리에 방점이 실리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근사하다면 작가에게도 관심이 가게 된다. 하지만 에세이는 작가가 궁금해야 읽게 되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걸출한 작품을 펴 낸 검증된 작가 거나 방송에도 출연할 만큼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어야 선택받기 쉬워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내가 허구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할 때마다 한 페이지를 미처 못 채우고 삼천포로 흘렀다. 그 삼천포도 기발하거나 매력적이면 독자가 기분 좋게 유영할 수 있는 또 다른 강줄기가 되었겠지만 내 경우에는 쓰는 내가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팩폭러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 글 쓸 줄 안대
부모님과 함께했던 제주도 여행에서 외딴곳에 예쁘게 꾸며둔 독립서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에 온 기념으로 책을 한 권씩 사자며 엄마 것도 사 드릴 테니 골라 보시라고 했다. 우리는 둘 다 에세이를 골랐는데 엄마가 고른 책은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분이 ‘유쾌한 아줌마’를 자칭하며 캐주얼하게 쓴 글 묶음이었고 내가 고른 책은 김영하의 최신작 <단 한 번의 삶>이었다. 남은 여행 기간 동안 휴식 시간이 생기면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김영하 작가의 소설에는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처음 읽어 본 그의 에세이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특히 인생에 대한 관점과 본인이 겪은 에피소드에 대한 소회에서 나와 놀랍도록 비슷한 지점을 여럿 발견했다. 책을 잘 고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금세 본인이 고른 책에 흥미를 잃었다.
“내가 그냥 모르는 사람의 일기장을 읽는 것 같아. 듣기 싫은 수다를 계속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난 이 책 좋은데. 역시 소설가는 다르구나 싶어.”
이 대화를 통해서 나는 또 한 번 아, 역시 에세이야말로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를 느꼈다.
일주일이나 되는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부모님과 헤어지고 나니 헛헛한 마음이 몰려왔다. 어제 이 시간엔 뭐 먹었는데, 지난주 이 시간엔 어디 갔는데. 라며 태엽을 돌리듯 자꾸 여행의 시점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다 부모님과 이런 시간을 몇 번이나 더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닿았고 순간 굉장히 센티멘탈해졌다. 그래서 부랴부랴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을 적었다.
결혼을 하면 나의 일 순위를 배우자로 두어야 평화로워진다. 배우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를 위하듯 상대를 생각하면 이해 안 되는 것도 덮어지고 상처마저 내가 주었을 또 다른 상처로 탕감되는 경지를 내다보게 된다. 하지만 때로는 부모가 우선순위가 될 때가 있다. 부모의 나이를 셈 할 때, 부모의 건강을 살필 때, 부모의 일상 반경을 가늠할 때 문득 지금이다! 싶을 때가 있다. 점점 두려운 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뿌듯함보다 뭔지 모를 슬픔이 엄습한다는 것.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는 게 부부라 했다. 부모는 바로 그 부부이고 아빠의 머리는 정말 파뿌리마냥 희다. 나는 나의 파뿌리 시절에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부모는 아깝고, 배우자는 고마운 존재다. 엄마가 제주도 바다에서 주워준 현무암에 오래된 향수를 부어 디퓨저스톤을 만들었다. 훗날 이 작은 돌멩이를 가슴에 문진처럼 괴어 놓고 나부끼는 기억의 조각들을 내려 누르려 애쓰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기공 사이로 숨을 뱉으며 할딱이게 될 거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때 아마 내 목덜미를 붙들고 뭍으로 건져줄 이가 남편일 것도 안다.
이 글을 복사해 엄마에게 보냈다. 그러자 엄마가 예전에도 써 둔 글들 여러 편 있지 않냐며 모아서 책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딸에게도 지독한 객관성을 잃은 일 없는 엄마의 조언에 흠칫 놀랐다. 뭐라고?
“에이, 엄마 그 책 읽고서도 남의 일기 같아서 재미없다 해놓구선. 내 글도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그냥 남의 일기지 뭐. 누가 관심 있겠어.”
자아성찰인지 투정인지 애매한 내 말에 엄마가 또 한 번 일침을 날렸다.
“그래도 네 글에는 스토리가 있잖아. 한 번 해봐. 더 늦기 전에.”
무슨 스토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이상의 설명을 해줄 엄마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폭삭 속았수다> 말미에 애순에게 시어머니가 왜 시를 안 쓰냐며 내가 너라면 벌써 수백 편을 썼다고 타박인양 응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에게 애순이처럼 절절한 희로애락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응원을 듣고 애순이가 용기를 냈던 순간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겠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브런치에 올린 글 중 몇몇에는 진심 어린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에 눈물이 났다고 한 이도 있었다. 유려한 표현이나 번뜩이는 재치가 담긴 글은 아닐지라도 그냥 내 이야기일 뿐일지라도 어떤 글들은 예쁨을 받기도 하더라. 엄마의 말을 계기로 나는 ‘재주가 있는 이가 쓰는 글’이 아니라 ‘글 쓰는 재주’ 자체를 인정해 보기로 했다. ‘재주’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과 슬기’, ‘어떤 일에 대처하는 방도나 꾀’라고 한다. 내 경우의 재주는 아무래도 후자 같다. 흔히 우리가 ‘재주 부린다’는 표현을 쓸 때도 그 행위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 보기에 즐겁다는 뜻으로 통한다. 나는 내 일상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마음과 기록하지 않으면 참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 놓여나기 위해 꾀를 쓰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고요하고 소소한 삶 속에서 혼자 공을 굴리고 훌라후프를 뛰어넘는 미련한 곰의 재주다. 이미 충분한 꿀단지가 있지만 더 이상 꿀만 퍼 먹고 있자니 엉덩이가 바닥에 붙어버릴 것 같아 들썩이는 존재감 충만한 곰의 원맨쇼다. 그러다 어느 날, 사람 냄새 좀 풍길 줄 아는 글을 쓰게 된다면 그로써 당당히 외치게 될 것 같다.
여기, 있어요. 사람!
.. 저, 사람이었네요. 글 쓰는 재주를 부리는 것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