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뿌리 부부

부모에서 부부로

by 바다하나

오전 8시.


주말 아침은 늘 남편이 내리는 커피 향에 눈을 뜬다.

오늘 처럼 남편이 커피를 일찍 내리기 시작하면 나도 덩달아 일찍 눈이 떠지는 것이다.


눈은 아직 반쯤 감은 채 주섬주섬 가운을 입고 커피 향을 따라 주방으로 나가면 남편은 오늘은 무슨 무슨 종류의 원두이고 향과 맛은 이러한 것이 특징이며 어떤 방식으로 내렸는지를 설명하며 어깨에 뽕이 잔뜩 올라 내 앞에 커피를 짠 내놓는다. 가끔은 라테 아트까지.


몇 년째 정성스럽게 원두를 고르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커피를 내리는 남편은 무슨 마음일까. 일단 내가 그의 유일한 실험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내 반응을 기대하는 남편의 반짝이는 눈빛을 애써 외면한다.


“응, 맛있네.”


갓 볶은 원두를 갈고 끓이고 내려서 만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우리 부부의 주말이 시작된다.


간 밤의 기괴한 꿈 이야기부터 너 어젯밤에 화장실 많이 가더라. 화장실 휴지 떨어져 가던데 주문했냐. 등으로 시작되는 중년 부부의 주말.


젊은 시절, 우리가 아이들이 모두 품을 떠난 부부의 주말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자던 결혼식 날의 약속이 진짜 이렇게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부둥켜안고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이들이 어릴 땐 둘만의 조용하고 오붓한 시간을 그리워했었지. 그저 쉼 자체인 여행을 상상했었지. 그때 우리의 상상엔 우리의 흰머리는 없었지.


드디어 아이들을 키워놓고 이제 둘만의 시간이 허락되었지만 그게 이렇게 다 늙어서일 줄이야. 반갑기보다는 어쩐지 쓸쓸하다.


아이들이라도 집에 있어야 시끌벅적해지는 집안이,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이 쓸모 있음이, 환한 거실의 불빛이 소용 있음이, 쓸쓸하다.


그 쓸쓸함을 우리는 서로 고백하지 않는다. 이 쓸쓸함 마저 서로가 없다면 함께 느끼지 못할 테니깐. 우리는 오늘도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아이들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을 일, 둘만이 함께해도 충분히 꽉 찰 수 있는 일.



창밖으로 햇살이 거실까지 들어오는 걸 발견하며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다.


“음~ 오늘 햇살이 좋다. 이런 날은 꼭 우리 애들 데리고 한강으로 나갔었는데.”


“그럼 오늘 오랜만에 한강 공원 나가볼까?”


“아니, 그냥 오늘은 좀 그래.”


“그럼 드라이브 갈래? 강변 따라 드라이브하다가 맛있는 거 먹고 오자.”


남편도 아이들이 떠난 빈 집의 쓸쓸함을 눈치챘는지 비어버린 주말을 꽉 채우고 싶은 모양이다.


그냥 오늘은 마트에 가서 장이나 봐오기로 한다. 와인도 똑 떨어졌고, 저녁거리를 대충 사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남편이랑 마트에 가면 늘 재미있다. 서로 이것저것 가격도 비교하고 새로 나온 전자제품도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둘이서만 사는 집이라 사실 필요한 음식도 물건도 별로 없지만 여기에만 오면 하루가 금새 지나가는데다가 구경하며 걷다 보면 적당히 운동도 된다. 장 보는 건 핑계이고 중년 부부가 놀기에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남편이랑 키득키득 농담을 하며 마트를 돌아다니는 데 갑자기

젊은 시절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불러대던 그 지겨운 “엄마” 소리가 귀에서 맴돈다.

먹일 사람도 없는 커다란 스테이크용 고기가 좋아 보여 한참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휙 돌려본다.


‘엄마! 과자 하나 더 사도 돼?’

‘엄마 저쪽에 먼저 가있을게요.’

‘엄마 카트 제가 밀면 안돼요?’

‘엄마! 이거 마지막 하나야.’


재잘거리는 꼬마 아이들의 목소리에 뒤돌아본 나 자신에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며 고기를 다시 자리에 놓아두려는데,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내 눈을 읽은 남편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다독인다.


“이제 계산하러 갈까?”


늘 둘이서 재미나게 다니는 마트이지만, 중년이 된 우리 부부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용량으로 사야 하는 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 따라서 커다란 스테이크용 고기를 다듬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 집에 들어와도 밀려있는 아이들의 숙제가 없다는 것, 씻기거나 재우거나 잔소리를 하거나 야식을 챙겨줄 필요가 없다는 것, 홀가분하게 와인을 한잔 따라 넷플릭스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우리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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