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한잔

by 바다하나

‘4년 만인가, 5년 만이었던가.’


대학교 동창 민지를 만나러 가는 선영의 얼굴은 한껏 들뜬 표정이다.

지하철 창문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몇 년 전, 민지를 만나던 그 날을 떠올린다.

민지는 큰애가 고등학교를 입학한다던가 하며 사춘기 딸 걱정을 늘어놓았고

선영도 미국으로 유학가 있는 아들 이야기를 했었다.

선영의 아들은 이제 곧 군대에 가게 되어 며칠 후면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이었고,

선영의 기억이 맞다면 민지의 큰딸은 벌써 대학생일 것이다.


선영은 미국에 아들을 보낸 지 이제 7년 가까이 되어간다. 처음 갓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를 미국에 두고 올 때가 떠오른다.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가 없어 뒤도 안 돌아보고 왔지만 서울에 와서는 미국 보스턴의 시차에 맞추어 낮밤이 바뀐 생활을 얼마나 오랜 날을 했는지 모른다.

미국밥은 입에 잘 맞는지, 보스턴에 있는 숙모가 잘 챙겨주고 있는지, 혹시 인종차별 같은 걸 겪는 건 아닌지.


선영은 아들이 얼마나 신나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걱정에 매달렸었다.

그렇게 그리움만 쌓인 채 아들의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던 선영이었다.


그날도 선영은 새벽 3시에 드라마를 틀어놓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

혹시 그러나 절대 올리 없는 아들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갑자기 몸이 화끈거리고 옆구리부터 겨드랑이까지 통증이 몰려왔다.

이러다 죽는 건가 싶어 전화기를 붙잡고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러 안방으로 가는 길이 선영에게는 너무 길었다.

기어가다시피 안방 문을 겨우 붙잡고 ‘여보, 나 좀 살려줘...’라고 소리치고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의사는 대상포진이라고 했다.

곧 갱년기가 다가올 나이인 데다가 몸이 너무 약해져 있다고.

온갖 약 처방과 주의사항을 듣고 병원을 나서는 길.

그때도 선영의 머릿속에는 온통 보스턴 시차뿐이었다.


그런 선영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연민, 동정 그런 것은 비할 수도 없는 어떤 포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선영은 그때까지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선영의 분신과 같던 외동아들을 미국에 떨어뜨려 놓고 헤어져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들에게 언젠가 한번 물어본 적이 있다.

“아들, 힘들지 않아? 힘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도 돼... 알지?”

아들의 대답은


“No.”


지금은 웃음이 나지만,

그 짧은 “노!” 한마디가 선영의 가슴을 바닥까지 떨어뜨려놓았다는 걸 누가 알까.


대상포진 치료를 핑계로 선영은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몇 달을 누워만 지냈다.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었고 아예 밤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날이 많아졌다.

민지에게 전화가 온건 그때였다.


“선영아~잘 지내지? 오랜만에 생각나서 연락했어.”

“그럼 잘 지내지~ 나 얼마 전에 대상포진 진단받았는데 이제 거의 다 나았어..”

“어머! 야 고생했겠다.... 몸이 너무 약해진 거 아니니? 언제 시간 내서 만나자. 사는 얘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응? 아예 말 나온 김에 다음 주 화요일 어때?”


그렇게 민지와 선영은 강남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민지는 여전히 입담이 살아있었다.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지

사춘기가 심해져 엄마를 아예 피해 다닌다는 민지의 큰딸 이야기를 듣는 선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돌았다.


“야, 우리 딸 얘기하니깐 화가 뻗친다. 우리 와인 한 잔씩 할래?”


“어머, 난 술은 못하는데... 너 마시면 나는 입에만 댈게.”

그날 민지랑 분명 점심을 먹자고 만났는데 집에 들어온 건 밤 9시였다.

다음 날 아침 민지의 전화에 눈을 떴다.

“선영~~~ 야!! 너 어제 술 잘 마시더라?

너 대학교 때 원래 술 잘 마셨잖아..... 아직 살아있네 뭐."


“어머 나 기억이 잘 안나네... 웃고 떠든 기억뿐이야. 내가 술을 그렇게 마셨어?”


“우리 와인 두 병이나 비웠어. 너 한병, 나 한병, 크큭! 오늘 잘 쉬고.

어제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즐거웠어. 몸조리 잘하고 우리 또 만나자 선영아.”


선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뭔가 몸이 가벼웠다.

‘이 기분, 뭐지?’


그건 아마 오랫동안 쌓여있던 응어리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늘 어떤 묵직한 돌 하나가 가슴과 배 사이에 떡하니 얹혀있었는데 그게 사라져 있었다.


이상했다.


그날은 몸이 가벼워 근처 산책도 다녀오고 서점에도 다녀왔다.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그 이후로 선영은 마트에서 장을 볼때마다 와인을 샀다.

‘미국 보스턴이 어디더라?’


선영은 더 이상 아들 전화를 기다리지 않았고

아들은 몇 년뒤 미국에서 알아주는 대학에 스스로 척 붙어주었다. 역시 미국에 보내길 잘했다며 남편과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제 저녁, 먼저 카톡을 보낸 건 선영이었다.

“민지야, 잘 지내?”


민지는 그 사춘기 딸을 어찌어찌 대학에 보내느라

10년은 늙은 것 같다며 내일 당장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민지를 만나러 나가는 길.

선영은 민지를 만나면 제일 먼저 말할 것이다.


“야, 김민지! 오늘 와인 한 잔 어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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