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안 하던 짓을 해봤다
일단 렌트카에 탔다. 먼저 가야 하는 곳은 런던베이글. 차에 탄 사람들이 다 신나하길래 일단 나도 신나했다. 근데 런던베이글이 뭐야? 그런 질문은 입밖으로 하지 않는 센스.
무리가 함께 어딘가를 갈 때는 마음이 참 편하다. 그러니까 내 여행은 두 가지 종류다. 혼자 하는 여행. 같이 하는 여행. 후자는 아주 마음이 퍼져있다. 긴장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다. 되게 유명한 빵집인 것 같은데 웨이팅 천 번째라고 해서 좀 놀랐을 뿐. 그 외에는 그냥 드라이브를 즐겼다. 백미러로 운전하는 오빠를 보며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런던베이글을 가고 느낀 건 기다리는 건 진짜 길고 가게 안은 정말 바쁘고 나오는 건 아주 빠르다. 제주도에서는 사람들이랑 전부 맛집을 찾아가는 바람에 (혹은 덕분에) 웨이팅이라는 걸 처음 해봤다. 홍콩에서 몇 번 해보기는 했어도 1시간 이상으로 기다리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그냥 가까운 밥집으로 밥 먹으러 가는 내게는 어딘가를 찾아가고 기다린다는 게 신세계다.
엄청나게 바쁜 가게 안은 정말 예뻤다. 직원분들도 의상 컨셉이 확싫해보였다. 이미 해탈해서 한여름에 땀을 소나기처럼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살짝 실소가 나왔다. 놀람의 실소. 엄청 기다려서 다들 덥고 짜증날텐데 손님들이 꽤나 만족스러워보였다. 이렇게 기다리게 하려면 이 정도의 완벽함을 가져야 하는구나. 그런 고찰을 해봤다.
롱플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카페가 예약제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센스. 한국이라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나라서 모르는 걸 테니까.
제주도도 여권 없어도 된다는 거 몰랐다.
가장 좋았던 곳은 사슴책방이다. 도착해서 내렸다. 뒤에는 비밀의 화원 같은 정원이 있다. 파스텔톤의 여리여리한 꽃들이 자연처럼 강직하게 자라있다. 원색의 테마파크 꽃들이나 할머니할아버지의 정원과는 다르다. 이건 정말 비밀의 화원 그 자체.
사실 사슴책방 때문에 이 여행을 왔다. 그림책 전문 책방이라고 해서 실망하긴 했다. 당연히 글자들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점은 안 가리고 다 좋아한다. 독립서점은 미지의 세계다. 그래서 무려 제주도에 있는 책방이라 기대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막상 가고 나니 너무 좋았다. 그림책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은 "여우요괴"다. 진짜 최고. 그림이 서늘하다. 너무너무 좋다. 그냥 요괴가 아니라 진짜 요괴 같았다. 설명하면서도 다 안 담겨서 아쉽다.
그리고 이때가 되서야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히 책을 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조용해진 시간. 집중하는 눈. 다물어진 입.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래서 책을 좋아한다. 난 핫플레이스 여행은 이 정도면 충분해. 이제 안 해도 될 것 같아. 남자친구 생기면 그냥 퍼져서 모든 걸 우연에 맡기자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