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하는 저녁 8시 밤산책

횡단보도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았다

by 바다

횡단보도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았다. 내심 반가운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이제 이 외계 행성 같은 홍콩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도 할 정도로 적응을 했다. 마치 오래 산 동네처럼 별 경계없이 편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걸 자각했을 때 나는 많이 기뻤다.


오늘은 두번째 웹소설인 로판 투고를 8군데를 하고, 점심을 걸렀다. 그 뒤 피곤해서 자고 일어나니 여섯시 반.

부담감이 날 꼼짝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미루고 미루던 과제를 드디어 했는데, 아뿔싸 기한이 하루 지나있었다. 그걸 보며 다시 날 자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우울증 초기 증상 같아서. (아직 우울증 증상에 대해 개뿔도 모르지만서도 말이다.)


PSYC2092. 정신병리학을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데 교과서를 누워서도 읽고 엎드려서도 읽었다. 첫번째 챕터는 무엇이 비정상이냐에 대한 기준과 역사들이었다. 읽으면서 조금 두려웠다. 정신병이라는 게 정말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주 미묘한 차이로 이게 그냥 지나갈 수도, 아니면 크게 번질 수도 있다는 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던 로판 시놉시스도 쓰고, 투고도 하고 잠도 자고 오후에 딱 일어나고. 나는 바로 샤워를 했다. 점심을 안 먹어서 배가 정말 거지라도 된 듯이 고팠다. 몽롱한 정신 상태로 유튜브를 켰는데 할명수의 빵지순례. 보자마자 결심했다. 오늘은 빵을 사자.


샤워를 뜨겁게 하고 저녁 8시에 기숙사를 나섰다. 카누 커피에서 증정받은 파란색 줄무늬 튼튼한 에코백을 한 쪽에 끼고 내 핑크색 아이폰 카메라를 딱 키고서 말이다. 왠지 기분이 좋아서 요새 주구장창 보는 작가 브이로그를 찍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 카메라 화면으로 보는 홍콩이 꽤나 예뻐서 더 그랬다. 나는 뭐 작가도 아니고, 습작생 브이로그라고 할까 생각하며 건조하게 키득키득 속으로 웃는데 횡단보도에서 본 것이다.


익숙한 얼굴을.


그녀는 내가 룸메 언니를 통해 1학기 막판에 들어간 기숙사 합창단의 소프라노다. 헤드폰을 딱 낀 그녀가 뭔가를 품에 든 채로 횡단보도 맞은 편에 서있었다. 머리가 탈색한 회색빛인 걸 보니 염색을 한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차마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녀를 보고 반가운 게 신기했고 그렇게 홍콩이 내게 익숙해졌구나 싶어서 더 기분이 좋았을 뿐. 나도 염색하고 싶다, 라고 스쳐지나가듯 생각하며 좁은 거리를 걸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는 한번도 안 샀던 식재료를 사겠다고 다짐해서 고구마를 20 홍콩 달러에 샀고. 한 번도 안 가본 빵집을 가겠다고 또 다짐해서 갔으나 저녁 8시에는 빵이 다 팔려있었다. 꽤나 기분이 좋았던 나는 하이 텐션으로 "왜 빵이 없어!" 라고 속으로 소리치며 빵집을 한바퀴 돌았다. 기분이 안 좋았다면 집에나 가자고 어둡게 생각했을텐데. 결국 빵을 샀다. 일본식 프랜차이즈 빵집의 진공포장된 롤케이크 조각 하나와 슈크림 하나. 내일 먹어야겠다.


내 카메라로 찍은 홍콩은 예뻤다. 여행지 같았다. 반짝반짝한 조명들과 이색적인 건물, 도로 등등. 여행자가 된 듯 카메라에 찍었고 꽤나 밤풍경을 즐겼다. 이층 버스와 빨간색 홍콩 택시.


밤에 하는 산책은 특별하다. 왜냐면 한국에서는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해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밤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조금 밉게 말하자면 팔할이 다 엄마 때문이다. 아니다. 어쩌면 중학생 때 본 영화 "청년경찰"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 밤에 지나가는 여자 옆을 어떤 차량이 쉭 지나간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빠따로 여자의 머리를 퍼거 치고 0.3초 만에 그녀를 차 안으로 숙 안고 들어간다. 그렇게 모인 여자들이 난자 판매를 위해 주사를 잔뜩 꽂은 채로 지하에서 모여 있는 장면. 내게는 아주 무서운 장면이었다.


밤마다 거리를 지나갈 때 혹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지금이야 청년경찰 내용도 가물가물하니 별로 무섭지도 않지만. 어쨌든 엄마 말도, 사회가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밤은 위험하니까. 그런데 여기 홍콩 케네디 타운의 저녁 8시는 꽤나 무섭지 않다. 사람이 아주 많다. 그것도 다 대학생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냥 엄청 큰 마을에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 같달까. 집성촌 같은 느낌이다. 그 정도로 편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씩 태극기가 붙여진 군 배낭을 맨 남학생들을 보면 바로 직감한다. 저 사람은 군대를 갔다 왔군. 그리고 한국인이군.


현재 나는 부엌에서 글을 쓰고 있다. 전에 말했던 러시아 여학생이 옆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녀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가끔 학교에서 보면 보라색 니트에 예쁜 금발을 위로 틀어올리고 벤치에 앉아있는다. 아침에는 여기 기숙사 플로어메이트들과는 거의 아침 인사를 하는데, 그녀의 인사는 특별하다. 활짝 웃으며 인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웃는 것 까지는 어렵던데. 아무튼 신기한 사람.


아침에는 정말 거짓마라 안 하고 손바닥보다 조금 안 되는 메뚜기가 스토브 위에 있었다. 그런데 얘가 움직이지도 않았다. 물을 팔팔 끓이자 수증기 때문에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더니, 청소해주시는 귀한 아주머니가 와서 손으로 찹! 잡고 창문으로 팍! 뿌렸다. 그녀에게 음꼬이와 또우제 중 어떤 감사인사를 해야할 지 몰라 일단 다 했다.


아악. 나방이 들어왔다. 창문으로 슉 들어와서 내 옆 창문에 붙었다. 나방의 날개짓, 아주 빠르다. 이렇게 밤에 창문을 열어두니까 나방이 들어오지! 아이구! 아아악! 다가오지마라! 나방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다니.


그럼 이만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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