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차- 나는 오늘부터 브런치 작가로 살아간다
내 삶의 언어로 글을 쓴다. 이것은 나의 " 일상에서 글감을 건져 올려 나누는 작가이다."로 명명한 이유이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순간들을 지나친다. 지나치는 순간은 너무 평범하고 익숙해서 우리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한 채 흘러가 버린다. 하지만 누군가 그 순간에 잠시 멈춰 선다면 그것들을 들여다본다면 어떨까. 평범한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과 마주하고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때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은행 빛이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주말에 고택으로 차 봉사를 하러 갔다. 밀양에는 은행나무가 일품인 고택이 많다. 그중에 내가 선택한 곳은 오연정이다. 800년 된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노란빛으로 물 들어가는 가을이 오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구부터 밝고 환한 황금빛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때문이다. 고택과 은행나무의 조화로운 어울림이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곳이다. 낮 12시 경이 가장 빛이 좋다. 은행나무는 햇빛이 들어와야 노란빛이 더욱 빛난다. 담 넘어 보이는 은행나무의 빛과 우람한 모습이 고택과 잘 어울려 기운까지 느껴진다.
올해 가을에는 오연정 은행나무 관광객이 많다. 은행나무와 고풍스러운 고택이 어울리는 오연정에서 차 봉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연정에는 올해부터 궁중음식 체험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음식 체험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있다. 물론 예약제이다. 하루에 한두 팀만 받기 때문에 음식 체험은 귀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일요일 오연정 앞마당 한편에 차 자리를 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나의 생각으로 가을을 보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일요일은 관광객이 더 많았다. 차 자리를 펴기도 전에 줄을 선다. 아크릴 판에 '대추·생강차 무료 시음'이라고 적어두었다.
차는 고택과 어울리는 우리의 전통차를 만들었다. 단장면 대추 2㎏, 생강 1㎏, 배 3개를 넣고 며칠 동안 끓였다. 생강대추를 끓여서 물을 만들어 붓고 또 끓여서 붓는다. 이렇게 모은 대추 생강차를 한데 모아 또 끓인다. 오연정에는 전날에 가서 생강대추를 한번 끓여 두었다. 오연정에는 음식을 하는 곳이라 차를 끓일 시간이 부족했다. 덜 끓여진 차물을 마당으로 가지고 왔다. 그 집에 있는 가스통을 빌려서 큰 냄비에 대추 생강 차를 다시 끓였다. 내가 집에서 끓여서 가지고 온 보온병과 주전자에 담긴 차를 먼저 꺼냈다. 줄을 선 사람들에게 대추 생강차를 나누어 주었다. 차 한 잔에 잣, 대추 칩을 올려주었다. 사람들은 왜 차를 주는지 몰랐다. 어떤 사람들은 물어보았다. 나는 대답했다. " 가을이 주는 선물이에요.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는 고택에서 따뜻한 차 한잔 대접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고마워한다. "어째 혼자서 이런 일을 하려고 생각했어요."
차 봉사는 단체에서 이름을 걸고 하는 경우가 많다. 다도회나 각종 사업명으로 진행되는 일들도 많았다. 그런 봉사엔 늘 ‘정해진 일정’이 있고, 나는 그 일정에 포함되어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차 봉사는 좀 달랐다. 내가 혼자 기획하고 준비해서 만들어낸 자리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묻는다. “어쩌다 혼자서?” “참 대단하시다고요."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이 듣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다. 그저 가을이 좋았고, 고택이 좋았고, 은행잎 밟는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이 좋아서였다.
다음날은 월요일. 밀양시 관광협의회에서 약 25명 정도가 온다고 했다. 차 한 잔 대접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까지 들어왔다. 월요일은 원래 바쁜 날이고, 시 낭송 수업도 있는 날이지만 특별 요청이라 점심시간에 맞춰 봉사하기로 했다.
월요일에는 일반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협의회 회원들이 관광 관련 공부를 하고, 이곳에서 음식 체험을 하는 일정이었다. 입구에서 차 한 잔씩 건네니 모두들 환하게 웃었다. 특히 관광협의회 손정태 회장님은 따뜻한 환대에 고마움을 전하며 깊숙이 인사를 해주었다. 초동 마을의 참새미허브마을을 운영하시는 분이라며 명함을 건네고 꼭 놀러 오라고 했다. 정리할 틈도 없이, 시 낭송 수업이 있어 서둘러 내려왔다.
가을의 주말과 월요일, 이틀 동안 차 봉사를 했다. 그 누구도 시킨 일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봉사였다. 아마도 그동안 문화기획자로 활동해 오며 쌓아온 경험이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했던 것일 테고, 무엇보다 가을이 주는 특별한 기운이 등을 살짝 밀어주었을 것이다.
건강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가 참 행복하다. 나를 위한 일도 하고, 남을 위한 일도 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네는 일은 언제나 삶에서 가장 보람이 큰일이다.
오늘도 나는 일상에서 글감을 건져 올린 작은 순간을 글로 품어보았다. 가을빛처럼 스며드는 이 따뜻함이 내 글을 움직이고, 또 누군가의 하루에 잔잔한 향기로 닿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