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 (2022)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스쳐 지나가는 편린들이 있습니다
'저 산 이름은 설악산이야, 이름이 뭐라고?'
차 타고 지나가며 아버지가 수없이 가르쳐 주셔도 전혀 기억을 못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구요
유치원에서 은행 놀이를 하다 곱하기와 나누기의 개념을 깨우친 기억도 있습니다
여느 아이들과 같이 지도를 펼쳐놓고 국가 - 국기 - 수도를 찾아가며 놀았던 기억 또한 있습니다
누가 가장 어렵고 덜 알려진 이름을 알고 있는가에 경쟁이 붙었을 때,
'수리남'은 그때 처음 들어본 후 지금까지 들어볼 일 없이 살아온 이름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애초에 지구 정 반대에 있는 남미로의 여행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인구 50만 남짓의, 대사관조차 없는 여행자제 지역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이죠
수리남 정부에서는 이 드라마 제목 '수리남'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지명 '수리남'이 아닙니다
그러한 제목은 그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시나리오 때문이지, 그 국가에 대한 악감정이나 불손한 의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 국가의 이름을, 그래도 60만에 가까운 국민이 거주하는 나라를 그렇게까지 무기력하게 표현할 것이라면 가상의 이름을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김해, 안양, 안산 정도의 인구 수가 거주 중인 곳이니,
지구 정 반대 어떤 나라가 이런 도시를 특정지어 마약 유통업에 종사한다 묘사하고,
무능력한 지도자를 세운 모습으로 묘사한다면 기분이 썩 좋진 않겠죠
개인적으로는 아수라의 '안남시'와 같이 가상의 도시를 설정하는 방식을 더 선호합니다
'창작의 자유를 보장 받으려면 그만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멋진 말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영상물은 가공의 인물, 장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만으로 모든 책임을 피해가는 것은 비겁해 보이거든요
시나리오가 실화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변명도 가능해 보이는군요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제목 설정이지만, 그러한 비판까지 수용하겠다는 제작자의 자신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의 경우 시놉시스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예상이 됩니다
마약과 사이비 교주의 만남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당연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뻔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딱 예상한 만큼의 폭력성과 잔혹성
딱 예상한 만큼의 반전을 선사하죠
어쩌면 이러한 제약을 두는 것은 넷플릭스의 정책 때문일수도, 국내 정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떤 가상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해 아쉽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예상한 만큼의 재미 만큼은 보장하기 때문이죠
딱 잘라 말하자면
브레이킹 배드 보다는 못하고 마약왕 보다는 잘했다 하겠습니다
제가 주목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가치는 '배우'입니다
하정우와 황정민이라는 굵직한 두 배우가 극을 이끌어가기는 하지만
박해수, 조우진, 유연석과 같은 배우들의 역할이 전혀 이에 밀리지 않습니다
장첸 배우 역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구요
연극, 영화 혹은 연기에 대한 학문을 익혀본 바가 없기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배우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가 배역이 되는 길'과 '배역이 배우가 되는 길'이죠
전자의 경우 소위 '메소드' 연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듯 한데,
후자의 경우는 견식이 좁아 잘 모르겠군요
전문 용어는 잘 모르니 '배역이 되는 길'과 '배우가 되는 길'로 부르겠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이번에 새로 개봉하는 영화 A가 있고, 그 주인공으로 어떤 배우 K가 캐스팅 되었다고 합시다
이 글을 보자마자 K 배우는 어떠한 역할을 맡아 어떤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라고 예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가 후자의 길에 해당하겠지요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배우'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그 배우가 되어버리는 것이니까요
제게는 이 영화의 하정우와 황정민 배우 님들이 그러했습니다
배경을 잘라내고 배우 모습만을 사진으로 보여줬을때,
이 장면이 어떤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솔직히 맞출 자신이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길을 보여주는 배우로는 조우진과 박해수 배우님이 있겠네요
여의도 증권사 앞에서 볼 것 같은 이 아저씨가 '요 썰고 조 썰고' 하실 줄 어떻게 알았겠으며,
찬송가를 부르는 마약 팔이 광신도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위태로운 연기를 하는 국정원 직원 분을 연기를 하고, 기훈이 형에게 역정을 내는 박해수 배우 님도 그런 배우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이 둘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 모두 훌륭한 전달 방식이고, 제작자는 적절한 배우를 캐스팅하여 작품을 완성할 뿐이니까요
정답이란 것이 있지 않기에 배우들의 변신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이 드라마가 흥미로웠던 점은 이러한 지점이었습니다
두 가지 타입의 배우들을 적절히 캐스팅 하였고, 두 그룹 모두 놀랄만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드라마를 보면서 그 내용에 온전히 집중한 것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드라마의 일부분이고 즐기는 방식 중 하나이기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 드라마는 그래도 추천할만하다 얘기할 것입니다
내용은 다소 뻔했지만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이 정도로 얘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