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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Apr 03. 2024

노인과 바다

아모르파티, 무소유, 언더테일

 어부 산티아고는 오랫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이다. 그가 물고기를 잡지 못한 지 어언 85일 째가 되는 날,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작은 돛단배를 이끌고 홀로 바다로 향했다. 조그마한 좌절이나 실망도 없이, 그는 항상 그랬듯 바다로 나서 미끼를 드리운다.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희망을 잃지 않은 그에게, 심상찮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한 가지 변수라면 예상치 못할 만큼 너무 힘이 센 물고기다. 손이 부르트고 상처로 패일 만큼 끌고 당기고 해봐도 소용없다. 물고기의 거센 힘에 이끌려 다니고, 밤낮이 새며 힘 씨름을 하길 사흘째가 되었을 때, 물고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몸 길이 6미터가량의 청새치였다. 노인은 지쳐버린 청새치를 끌어당겨 작살로 마무리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물고기를, 그것도 배보다 더 큰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너무나 커서 배에 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배 옆에 묶어 고정시키기로 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가 들이닥친다. 죽은 청새치가 흘린 피 냄새를 맡고 먹이를 쫓아 온 것이다. 노인은 치열하게 상어 떼를 떼 놓으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상어 떼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청새치의 커다란 뼈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저 커다란 뼈만을 지니고 집으로 돌아온다. 배보다 더 큰 물고기 뼈를 보고 놀란 마을사람들을 뒤로하고, 그는 오두막으로 들어가 사자가 나오는 꿈을 꾸며 편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1952년에 쓰인 이 소설은 저자 헤밍웨이의 취미였던 낚시의 경험이 밴 소설이다. 발매 직후 큰 인기를 누리고, 이듬해 이 소설로 퓰리처상을 수상, 그리고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일조한다. 이 소설은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이전에 쓴 작품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헤밍웨이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각종 전쟁과 대공황 등을 겪은 참전용사이자 종군 기자였다. 그러한 시대상과 작가의 경험이 녹은 탓인지 그의 작품은 주로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사실적으로 자세히 묘사하여 전쟁의 낭만과 환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부조리한 세계의 지독한 허무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쓴 이 “노인과 바다”는 이러한 인생의 허무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를 나타내는 소설의 대표적 문장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이 유명한 문장처럼, 소설 속 노인 산티아고도 거칠고 힘든 역경에서도 패배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의 환경을 겉으로만 보자면 열악해 보일 수 있다. 낡고 오래된 집, 밀가루 포대를 짜깁기한 돛을 단 배, 예전과 다른 기력의 늙은 노인, 84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어부, 이 열악한 상황들은 마치 소설 집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열악함 속에도 산티아고는 꾸준히 바다를 나선다. 절망과 패배가 아닌, 희망과 의지가 돋보인다. 그가 청새치를 낚았지만 결국 빈 손으로 돌아오게 되었음에도, 출항 때와 입항 때가 달라진 것이 없다 해도, 그는 청새치를 잡을 수 있었던 충만한 의지, 결의(Determination)를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에게 증명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빈 손으로 돌아 왔음에도 만족할 수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마치 소설 속의 항해처럼, 삶의 항해도 시작과 끝은 같다. 산다는 게 다 그렇듯이 누구나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간다. 산티아고처럼 나도 청새치의 뼈대라도 남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집착은 되려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노인이 처음부터 청새치를 잡는 것에 집착했다면, 그는 85일이 되기도 전에 지쳐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되든 안되든 한결같이 홀로 바다로 향했고, 미끼를 드리우며 단지 운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을 뿐,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라는 결의가 있었다. 하루하루의 항해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는 청새치를 낚았다는 남의 평가에 집착하지 않았다.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무용담을 늘어놓지도 않았으며, 자랑을 구하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의 결의가 옳았다는 확신을 혼자 얻었다. 만약 그가 남의 평가에 집착했다면, 청새치를 이긴 어부로서도 불렸겠으나, 한편으론 상어에게 청새치의 살점을 잃은 패배자로도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루하루의 항해에 충실했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가 충만했기에 연연하지 않고 사자 잠에 들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 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아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 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물건이 됐던 집이나 혹은 가구가 됐던 혹은 명예가 됐던 그만큼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많이 얽힌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처럼, 산티아고는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얽매임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다. 그리함으로 그가 꿈 꾼 황혼 속 해안을 뛰노는 사자들의 꿈은 이런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그의 영혼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러한 노인의 모습에서, 바다 위 항해에서, 나의 삶은 어디에 빗댈 수 있을까.
가깝게는 바다를 향한 이 직장에서의 삶이 그 항해일 수 있다. 내가 이 곳에 속해 하루의 절반을 지내며 생활해 나아가는 항해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지, 멀게는 살아가는 인생 전체가 항해일 수 있다. 태어나 살아 가게 될 이 짧고 긴 삶에서 나는 어떤 항해를 할 것인지.
 항해를 하는 마음가짐은 이 책을 통해, 노인 산티아고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허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항해의 끝을 맞이하는 법은 항해가 계속되는 한 꾸준히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답은 누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각자가 찾아가는 것일 테다.

 어느덧 2023년이 지나고, 2024년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카운트다운을 하고, 1월 1일 0시, 출항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면 나는 또 한 해 동안 나의 바다 위에서 나의 물고기를 찾아 움직일 것이다. 부디 그 여정이 어부 산티아고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의지가 충만해지는 한 해, 그런 항해가 되길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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