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주 Apr 29. 2024

여행의 이유

여행, 추구의플롯, 번지점프, 625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기도 하다. 미국의 문학가 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추구의 플롯'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소개한다. ‘추구의 플롯’은 주인공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들로, 탐색의 대상은 대체로 주인공의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다.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비결을 찾아 헤멘다. 주인공은 험난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추구의 플롯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로,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얻는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죽지 않는 비결을 찾아 헤맸던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법' 대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통찰에 른다.


 여행의 외면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준비한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수단을 검토한다.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작가는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휴양차 아내와 함께 중국을 가게 된다. 그러나 여권에 문제가 있어서 중국 공항에서 한국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이에 아내는 이참에 그냥 한국의 집에 틀어박혀 아무데도 나가지 말고 소설 집필에만 집중하라고 한다. 그러면 상하이에 간 것이나 진배없다면서. 시킨 대로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고 있자니 소설이 의외로 쭉쭉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상하이에서 당한 추방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만 순서가 살짝 바뀌었을 뿐. 원래 계획은 출국-상하이-집필-귀국이었으나 그것이 출국-상하이(아주 짧은)-귀국-집필로 바뀐 것이었다.


 나의 경험도 그렇다. 스무살이 갓 넘었을 때, 친구와 함께 수도권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당시의 외면적 목표는 그저 방학 기간에 수도권으로 여행을 가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가 수도권을 벗어나 춘천을 들르게 되었는데 지도에서 남이섬이라는 곳이 근처에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경치가 좋다는 말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남이섬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남이섬 입구에서 번지점프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곳에 번지점프대가 있는 줄은 생각을 못했다. 입이 방정이라고 여행을 계획하기 오래 전, 막연히 번지점프를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한 두번씩 입 밖으로 내뱉긴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갑작스런 만남에 놀랄 새도 없이 어느새 대신 값을 지불하고 있는 친구의 부추김에 떠밀려 55m 철골 위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뛰어내렸다.


 여행을 마치고 보니 가장 인상에 남은 경험이었다. 당시의 나는 막연한 고민과 불안을 지고 있는 사회의 햇병아리였다. 학교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미성년이라는 고삐를 풀고, 사회라는 초원에 풀어진 망아지였다. 하지만 자유와 방종은 한끝차이라 오히려 어떻게 날뛰어야 하는지 몰라 혼란과 부적응, 어설픔, 방황,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게 쌓인 막연한 감정들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여행을 계획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그 체증들이 낭떠러지로의 낙하와 함께 사라졌다. 번지점프의 유래가 바누아투의 한 부족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두려움을 극복해내고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는 의식이었다고 한다. 그 낙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나에게도 적절한 성인식이 되었다.


 나의 이 여행기는 외면적인 목표인 '방학 중 수도권 여행'과는 별개로 갓 성인이 된 불안을 떨쳐냈다는 내면적인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계획으로 이룰 수 있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 기구가 있는 걸 미리 알았다면 이런저런 안 할 핑계들을 찾아 마음을 굳게 닫았을 것이다. 그렇게 내면적인 목표는 얻지 못한 채 흘러갔을 테고 여행의 여운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뜻밖의 사실, 예상치 못한 사건, 계획하지 않은 일들을 만나며 엉뚱하지만 만족스런 경험을 얻게 되었다.


 여행기를 말할 때는 인생과 많이 비교한다. 흔히들 말하듯이 인생 자체가 길고 긴, 머나먼 여행기라고 볼 수 있다. '추구의 플롯'을 따르는 여행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던 것도 자신의 인생을 그 플롯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외면적인 목표들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기, 번듯한 집을 소유하기, 자식을 잘 키워 좋은 대학에 보내기 등. 그런데 이런 외면적 목표들을 모두 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희망한 것 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그 속에서 내면적인 목표를 우연히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기에 나타나는 ‘추구의 플롯’이 그러하듯이, 내 삶 속에서도 외면적 목표의 추구와 함께 만나는 뜻밖의 우연들을 통해 내면적 목표를 발견하는 재미, 그 55m의 설렘을 다시금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노인과 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