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를 좋아하지 않는 혹은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만이다.
나는 당신을 만날 의무가 없다. 20대에서 30대로 건너오며, 어느 순간 자연히 체득한 이 문장은 여전히 내 중심 문장이다. 물론 중심 문장이라 함은 세월의 파동에 따라 변주하고 변모할 것이나, 그 핵만큼은 중력과 같다.
만약 당신이 내향형이거나, 고도로 민감한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면, 이 문장은 단순히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오롯한 나’로 살아가게 하는 꽤 유효한, 그리고 투명한 기준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지독한 내향형이고, 공기 중의 떨림조차 신경 끝으로 읽어내는 인간이나, 동시에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 한 여자가 나를 참 미워했었는데, 그 잔상은 꽤 오랜 시간 꿈의 가장자리를 배회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견디는 것만으로 온몸의 기력이 소진되는 체질을 가지고도, 관계를 유예하기 위해 남들은 짐작조차 못할 노력을 기울여 온 이유다. (다만, 이런 노력과 내가 본래 지닌 무심한 성정은 별개의 영역이었지만.)
옛말에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건만. 어른들의 말에 틀린 말 하나 없으나, 적은 몰라도 그냥 나를 좋아하지 않는 혹은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만이다. 단, ‘그러라고 그래’ 하는 초연한 감각을 장착하기까지, 생의 일정 시간을 흘러와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 경우 10번의 만남 중 9번의 만남이 타인으로부터 생성되는데, 내가 좀처럼 누군가한테 먼저 만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서 잘 노는 기질 탓도 있지만,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게 단 30분일지라도. 내 하루의 모든 빛을 송두리째 끌어쓰는 몸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나의 안으로 굽는 성향을 이해하고, 더 정확히는 내 인정머리 없음을 알고도 만나자고, 만나자고 먼저 손 내미는 사람들이 고마워서.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와 주는 게 미안해서. 누가 보고싶다고 하면 가능한 시간대 옵션도 서너 개씩 제안하고, 그의 동선까지 계산해 중간 지점의 만남 장소까지 정해주었던. 그게 배려인 줄 알았던 내 성실했던 어린 날이 퍽 웃기고 찡찡하다.
서른을 지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우리의 생은 이미 촘촘하게 뒤얽혀 있기에, 역설적으로 나는 더 투명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해도 좋다는 사실을. 억지로 손을 맞잡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거대한 하나임을. 그 자명한 진실을 받아들인 이후, 내 관계의 부피는 줄었을지 언정 밀도는 비할 바 없이 깊어졌다. 내 결에 맞는 인연들이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채워졌다. 나는 내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 요즘 만나는 사람임을, 주저 없이 감각의 언어로 안다.
우리가 어떤 시공간에서 조우하는 것은 하나의 공명이다. 공명이 울리는 만남을 갖기 시작하면, 만남에 지독히 신중해져야 함을 알게 된다. 평소 내가 얼마나 나의 정신을 맑게 헹구고, 정갈하게 정화해 두어야 하는지 그저 알게 된다.
나와 타인, 서로를 만날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각자의 에너지를 내어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생과 생 사이의 강한 에너지의 교환이 일어난다. 찻잔 너머로 오가는 무언의 이해, 굳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전해지는 안도감 같은 것들. 그래서 누가 만나자고 하면, 물어야 한다. 내가 이를 만나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음을 상기하고, 그럼에도 이를 만나고 싶은가? 더 중요하게는 지금 이 시점에 그를 만나고 싶은가?를 내게 물어야 한다.
그 엄격한 질문의 문턱을 넘어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난 우리는 생의 갈피마다 두고두고 곱씹어 먹을. 설명되지 못할 멋진 하루를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