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호로록 먹고 싶어요.
삼대째 마음을 데워주는 음식.
다섯 살 딸아이는 국수를 유난히 좋아한다.
칼국수, 잔치국수, 우동, 짜장면... 면류는 전부 좋아한다.
그중에 유난히 칼국수를 좋아하는데,
칼국수에 대한 사랑은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문화센터 수업이 끝나고 아이와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 모녀의 방앗간이 있다.
바로 문화센터 아래층에 있는 국숫집.
문화센터 문을 열고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내려와 건물을 우리의 왼쪽에 끼고 한 바퀴를 돌면 집으로 가는 길 모퉁이 즈음에 국숫집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면 국숫집에서 진한 멸치육수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데
찰나의 순간에 나의 코는 육수 안의 재료들을 샅샅이 탐지해낸다. 육수용 멸치, 무, 파, 다시마...
대량으로 끓이는 멸치육수는 얼마나 진한지 냄새로 이미
국물의 깊이가 느껴진다.
허기진 코는 육수 냄새가 뇌로 가기도 전에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의 손안에 폭 들어간 아이의 조그마한 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다 싶으면 어김없이 종달새 같은 입으로 외쳤다.
'엄마 호로록 먹고 싶어.'
열댓 번도 더 가본 곳이지만
마치 처음 보는 듯 가게 안을 넌지시 바라보면
홍두깨로 직접 밀가루를 밀어서 반죽한 기색이 역력한 밀가루 범벅인 도마와 홍두깨가 보인다.
그렇게 늘 시각과 후각은 나의 이성을 잠재웠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배가 많이 고픈가 보네~' 하며
아이를 앞세워 가게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회사원들로 북적한 가게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으면 땀을 채 식히기도 전에 아이가 수저나 휴지를 뒤적이며 장난치려는 기색이 보이기에 행여나 손님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마음이 긴장으로 굳어진다.
아이의 앞접시와 수저를 준비해두고 셀프로 김치를 퍼 나르고서는 아이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넸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엄마~호로록은 언제 나와~' 하고
혀 짧은 소리로 해맑게 묻던 딸아이.
'기다리면 곧 나올 거야' 호기롭게 부리던 여유가 이내 조바심으로 바뀔 때쯤이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바지락 칼국수가 우리 모녀의 코앞에 놓였다.
면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칼국수의 반을 덜어내어 가위로 잘라주면 아이는 이내 국수가락을 호로록 맛있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면 미소가 절로 난다.
나는 남은 칼국수 면과 따뜻한 국물을 들이키고 나면 긴장으로 반쯤 굳어 있던 내 마음이 뜨끈하고 말랑말랑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이제 겨우 세 살인데 누굴 닮아 이렇게 국수를 좋아하는지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머릿속에 모락모락 칼국수의 뜨거운 김처럼 떠오르는 사람.
'아버지'
아버지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다.
스무 살에 아버지는 군대에 가기 하루 전날 할머니께
'엄마 나 군대 다녀올게'라고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뒷목 잡으셨다는데 아버지는 스스로 아주 사나이답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어렸을 적 형편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보리밥을 지금도
아주 싫어하신다. 흰쌀밥이어야 하고 칠첩반상이 아니면
미간에 얼굴의 모든 주름을 모은채
''반찬어디있노'' 라는 여섯 글자로 한순간에 엄마를
열 받게 하는 재능도 있으시다.
그런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잔치국수'
국수가 먹고 싶은 날이면 퇴근하기 전에 웬일로 어머니께 문자를 하셨다.
딱 두 글자 ''국수''
두 글자가 찍힌 문자를 멍하게 어이없이 바라보면서도
이내 분주하게 부엌에서 국수를 만들 준비하시는 어머니.
음식을 정갈하게 잘하시는 어머니는 국수를 할 때면
멸치육수를 진하게 내고 당근과 애호박도 달달 볶아 바시락 바시락 김도 예쁘게 자르고
노란색, 하얀색 계란 지단을 가지런히 채 썰어서 고명으로 올리셨다. 어머니께서 완성한 국수 한대접안에는 세상의 모든 예쁜색이 다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서로 못마땅하다며 그렇게 투닥거리면서도
어머니는 국수를 하는 날에 항상 국수사리를 넉넉하게 준비해두신다.
아버지께서 드시고 또 드실 수 있도록.
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큰 대접에 한가득 드시고도
어머니께서 넉넉히 준비해 둔 사리가 있는 곳으로 어슬렁 어슬렁 발길을 옮기신다.
소화기관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꼭 그런 날이면 늦게 퇴근하는 나에게 문자를 보내셨다. ''아람사이다''
그래도 나는 다섯 글자다.
냉전 중인 부모님 사이로 인해 다소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우리 집이었지만,
그래도 국수를 먹는 날에는 어쩐지 따뜻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국수를 좋아하는 이유.
유난히 아버지와 많이 닮은 나는
아버지와 식성도 비슷하다.
유난히 날 닮은 딸은 식성도 나와 비슷하다.
국수가락만큼이나 길게 이어져 내려오는 식성.
삼대째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고서는 많이 변했다.
늘 미간에 11자 주름을 그리고 있었던 아버지가
손주들과의 페이스톡에서는 얼굴 근육이 다 풀린 웃음을 흘리고 계신다.
손녀바보라고 놀림당해도 아랑곳 않고
'우리 공주님 빠빠 먹어쪄요?' 혀 짧은 소리를 내신다.
나에게는 문자가 짧으셨는데
손주들에게는 혀가 짧아지셨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들어주는 일은 천지가 개벽할 일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손주들 반찬을 만든다고 하면 국간장이며 고춧가루며 무엇이든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아이들은 아직 고춧가루 들어가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으신가보다.
나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참 좋다.
그래서 국수는 나에게 음식을 넘어선 연결의 의미로
다가온다.
연결이자 관계의 개선.
기다란 면발이 장수의 뜻을 담고 있는 만큼
부모님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인생이란게 늘 잔칫집같이 행복할 수만은 없겠지만
이따금 잔치국수를 먹는 날만큼은
가족 안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그리고 마음이 데워지는 그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더욱더 소중하게 보듬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