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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May 11. 2016

엄마의 밥

5월 어느 날의 일기

보글보글, 탁탁 부엌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나는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게 된다. 그리고 엄마는 새로 지은 그 밥을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반찬 삼아 냉장고에 차게 식어 있는, 어제 먹다 남은 밥을 꺼내어 먹는다. 엄마는 왜 그거 먹어. 새 밥 같이 먹자. 해도 엄마는 그 밥이 맛있단다.


누군가 그랬다. '집밥'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할 줄 아는 게 얼마 없을 것 같다. 고.


그러고 보니 나는 부엌에서 할 줄 아는 게 얼마 없다. 뚜닥거릴줄만알지 제대로 한 끼 차려먹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래. 난 차려진 거 먹을 줄만 알았지,  누구를 먹이 기는 커녕 스스로를 먹이는 일도 익숙지가 않단 말이다. 그런 주제에 밖에만 나갔다 하면 ‘집밥’이 그립다고 타령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집밥’ 이란 건 결국 ‘배고플 때를 맞춰서 엄마가 잘 차려준 밥’인 거였다.


엄마는 그 잘 차려진 밥 한 끼를 위해 시장에 가고, 야채가게 아저씨와 흥정을 하고, 양 손 가득 한 보따리 잔뜩 들고는 집에 돌아와 잠시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아까 사 온 그 야채를 송송 썰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딸내미 좋아하는 햄도 구워냈을 텐데. 그 모든 행위의 목적은 절대 본인이었던 적이 없었는데. 미련한 나는 그 과정과 거기에 담긴 마음은 모두 제멋대로 삭제해버린 채 따뜻하게 잘 차려진 결과적인 ‘집밥’을 예찬할 줄만 알았다.


엄마도 밖에 나가면 나처럼 집밥이 그리울까? 아닐 것 같다. 엄마에게 집밥이란 내가 오늘 아침 남기고 간 밥이거나  모두가 나간 텅 빈 집에서 텔레비전을 밥동무 삼아 물에 말아 한술 삼키는, 그 밥일 테니까. 같은 집에 살아도 같은 '집밥'을 먹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집밥이란 말은 이렇게나 모순적이고 이기적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아니. 어쩌면 엄마에게도 집밥은 엄마 어릴 적에 먹던, 엄마의 엄마가 해주었던 그 밥일까. 엄마도 나처럼 그렇게 엄마의 엄마에게 작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순진한 내 딸이던 시절이 있었을까. 엄마는 그때가 그리울까. 엄마는 엄마의 집밥이 그리울까.


나는 내일이면 또다시 밥을 남길 테고, 밥투정을 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습관이란 건 불행히도 쉬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엄마는 이제 조금은 알겠지. 사실 내가 많이 미안해하고, 많이 고마워하고 있단 사실을. 엄마는 지금 이 글을 건너편의 불 꺼진 작은 방 안에서 숨죽이며 읽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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