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서

-박수근-

by 남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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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아기를 업고 서 있다. 내리 깐 듯한 눈에는 체념이 살짝 보이나, 유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개를 약간 숙였지만 반듯하게 편 어깨와 허리, 두발을 벌려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 강단 있어 보인다. 동생을 받친 손 또한 힘이 들어가 야무져 보인다. 이미 오랜 시간 기다린 듯 얼굴에는 지루함도 언뜻 보인다. 무명 처네에 싸인 아기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다 업힌 아기는 주인집 아기가 아니라 소녀의 막냇동생일 것이다. 일 나간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동생을 업고 마중 나왔을 것 같다. 어쩌면 칭얼거리는 동생을 업고 나와서 한참을 돌아다니던 끝에 이제야 동생이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보내야 하기에 열린 시간을 건네러 나왔을 것이다.


화가는 참으로 다정하다. 삐쭉빼쭉한 바보단발을 단정하게 그려 주었다. 턱을 살짝 내려 소녀의 고단함을 무심하도록 만들어 주었고, 내내 칭얼거리던 동생을 천사처럼 그려 주었다. 몇 년 동안 동생들을 업었던 낡은 무명 처네는 단단하게 보이게 해 주었고, 업은 아기가 자주 흘러내리는데 등에 딱 붙여 안정되게 그려주었다. 찢어진 검정 고무신도 새것처럼 그려 주었고, 볼 살도 통통하게 그려주었다. 소녀의 배경도 거칠지만 따뜻하게 그려주었다. 소녀의 눈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그려주지 않아서 다행이다.


열한 살이 된 나는 화장품 외판을 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막냇동생을 돌보았다. 가난한 집 장녀인 나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채 한 살이 못된 동생을 돌봐야 했다. 물을 긷고, 청소도 하고, 동생들과 밥도 데워 먹으며 집안일도 곧잘 했다.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막내는 거의 내 등에 업혀 있었다. 다행히 막내는 순했다. 잘 울지도 않고 신중해서 함부로 주변을 헤집지도 않았다. 그런 순한 막내를 업고 집을 나오는 것이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집을 나오면 내 마음대로 다닐 수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도 구경하고, 배밭 집의 애 보개와 함께 시장 언저리 가설건물에서 약장사들이 하는 연극을 보러 가기도 하고, 만화방에서 동생을 업은 채 서서 만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막내가 배가 고파 칭얼대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엄마의 젖을 먹을 수 없는 동생은 쌀로 만든 죽도 곧잘 받아먹었다.


나는 엄마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저녁 무렵이 되면 자주 동생을 업고 아랫동네까지 내려갔다. 엄마가 오는 길목에 서서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렸다. 가끔은 해가 저물어도 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두워지고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지나도록 엄마가 오지 않으면 나는 절망했다. 우리 집은 단칸방이었기에 집에 가면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아버지가 싫었고 엄마가 안 오면 내게 이것저것 시키는 것도 싫었다. 엄마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여전히 우리 막내는 칭얼대지도 않고 내 등에 찰싹 붙어있었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저기서 엄마가 오고 있다. 젊은 엄마였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맨 초록색 화장품 가방이 더 무거워 보인다. 엄마는 길에서 내 등의 막내를 받아 안는다. 나는 한 손에는 처네를 한 손에는 화장품 가방을 들고 엄마를 따라간다. 엄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에게 젖을 물린다. 배부른 막내는 생글거리고, 단칸방에 딸린 작은 부엌에는 음식 냄새가 풍긴다. 엄마가 집에 오면 그제야 나는 마음이 편안 해진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 엄마는 초록색 화장품 가방을 들고 집을 나간다. 나는 동생들을 돌보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물도 긷고, 시장도 본다. 아버지의 심부름과 집안일을 다 끝내면 막내를 업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거리에서 또 엄마를 기다렸다.

아기를 업고 있는 한 소녀. 그 소녀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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