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마루

by 남새

우리 집 거실 발코니에는 탁자가 하나 있다. 어느 시골집 철거할 때 나온 대청마루로 만든 탁자다. 대청마루 모양을 그대로 살린 채 크기만 줄인 탁자는 오랜 세월이 입혀진 정겨움과 편안함도 그대로다. 이십여 년 전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사라진 시골 우리 집 대청마루랑 꼭 닮아 며칠을 고민하다 큰 마음먹고 샀었다. 가족들은 우리 집에서 제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하고, 너무 크고 길어 거실이 좁아 보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탁자를 볼 때마다 왠지 몽글하게 따뜻해지는 내 마음을 그들은 알 길 없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애틋했던 마음도 무디어져 가고 지금은 몇 개의 난초와 꽃나무를 이고 앉아 있는 탁자가 왠지 안쓰럽기도 하다.


예닐곱 살 적, 시골 우리 집에 대청마루가 있었다. 할머니가 계시는 안방과 부모님이 계시던 작은방 앞으로 넓은 나무 칸이 촘촘히 박혀 있는 커다란 마루였다. 부모님과 동생은 도시로 나가고 할머니, 삼촌들과 시골에 살고 있던 나는 대청마루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대청마루 끝에 나와 앉아 낙숫물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마 끝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물이 떨어져서 땅을 파고드는 소리, 고인 물 위로 찰박찰박 우리 집 메리가 지나가는 소리, 앞마당 닭장 구석에 녹슨 철판 위로 떨어지는 맑고 청아한 빗소리. 처마 끝에서 일렬로 떨어지는 비의 모양, 빗물이 끊기고 이어져서 땅으로 박히는 모습. 놀라서 튀어나오는 작은 물방울들, 흙 마당에 생기는 오밀조밀 작은 물웅덩이, 그 위로 떨어지는 불규칙한 물방울. 물방울이 만드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 나는 비의 소리와 비의 모양이 너무 좋아했었다.


남부라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지만 가끔씩 눈이 왔다. 눈 오는 날 할머니가 집에 계시면 우울했다. 할머니는 나의 청승을 싫어하셨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안 계신 날 눈이 오면 나는 부모님이 쓰시던 초록색 양단 솜이불을 끌고 대청마루로 나갔다. 이불의 반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얼굴만 내놓고 몸을 꽁꽁 싸맸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눈을 맞이했다. 비록 싸라기눈이라 하더라도 눈이 내리는 곳으로 작은 내 시선이 따라갔다. 기웅이 아재가 망개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주었던 앞산에도, 연지곤지 찍고 반짝거리는 족두리를 쓰고 시집간 오촌 고모가 살았던 건너 마을에도, 나보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큰 동갑내기 고종사촌이 사는 마을 끝 큰 고모 집에도 눈이 내렸다. 동네 한 복판 큰길에는 아이들이 소리치며 눈을 잡으러 뛰어다녔다. 우리 집 바깥마당에 산처럼 쌓아놓은 볏짚 위에 내리는 눈은 녹지 않고 가만히 쌓였다. 커다란 구렁이가 넘던 우리 집 담벼락에도, 사랑방 앞 큰 감나무 가지 사이에도 눈이 내렸다. 반들반들한 댓돌 위에도 눈이 하나씩 내려앉았다. 쌓이지도 못하고 날리기만 하는 그 싸라기 눈은 한겨울 최고의 선물이었다.


햇빛 가득한 어느 봄날 오후, 대청마루에 모로 누운 할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머리를 찧으라 하셨다. 할머니는 머리 만지는 걸 좋아하셨다. 머리를 만져드리면 쉽게 잠이 드셨다. 나는 싫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고 꼼짝하지 못하고 잡혀 있어야 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씀은 곧 법이니 도리가 없었다. 할머니가 잠이 들 때까지 이를 잡는 것처럼 빈 머리를 찧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반백의 머리카락 사이 작은 내 두 엄지를 부딪혔다. 할머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자는 눈이 아니다. 손은 할머니 머리 위에 눈은 할머니 얼굴 위에 있었다. 드디어 주무신다. 두 손을 살며시 거두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움찔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는 힘이 빠지고 내 눈도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어느 결에 나도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커다란 대청마루에 할머니와 손녀가 봄 햇빛을 이불 삼아 달콤한 낮잠에 들기도 했다.


나는 어려서도 먹성이 좋았다. 밤 11시쯤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대청마루로 나갔다. 온 동네가 환하도록 전기 불을 밝혀 놓고 부엌과 대청마루 사이 찬장에서 밥과 김치를 꺼냈다. 마루 가운데에 앉아 하얀 밥 위에 빨간 김치를 척척 걸쳐서 배가 볼록해지도록 먹었다. 불빛의 끝자락 어둠이 무서워 두리번거리면서도 할머니가 남겨놓은 밥을 다 먹은 후 에야 다시 잠이 들었다. 초저녁에도 분명 배가 터지게 저녁밥을 먹었지만 배꼴 큰 손녀를 위해 할머니는 매일 넘치게 저녁밥을 지어 찬장에 밥과 반찬을 넣어 두셨다. 대청마루에서의 밤참은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시골 우리 집에는 제사가 많았다. 특히 할아버지 제사는 마을의 잔치였다. 부산에 사는 고모들까지 다 오시는 제삿날은 북적이는 사람과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마을 아낙들이 부친 고소한 전들이 하나 둘 대청마루 한 곳으로 모였다. 장정들이 절구통에 찧어 만든 찰떡도 노란 콩가루를 입고 대청마루로 왔다. 곱게 쪄낸 생선들도 대청마루로 올라왔다. 완성된 갖가지 음식들이 소쿠리에 얌전히 담겨 대청마루에 올라오면 알록달록 보자기가 덮였다. 대청마루 한 곳이 꽃밭이 되었다. 제사가 끝나고 남은 음식은 모두 광으로 갔지만, 음식들이 사라진 대청마루에는 다음날까지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다.


동네의 엿장수가 가위를 철커덕거리면 나는 대청마루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손잡이가 망가진 호미라도 있는지, 빈병이나, 할머니의 구멍 난 고무신이라도 있는지 구석구석 헤집어본다. 아주 가끔 운 좋은 날도 있지만 대부분 먼지만 폴폴 뒤집어쓴 채 빈손으로 나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을에 가위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나는 대청마루 아래로 기어들었다.


차갑던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 집 안팎으로 북적이던 사람들, 커다란 마당, 따뜻하던 햇살과 맑은 비와 날리던 눈, 차가운 바람, 뜨겁던 태양, 나의 유년시절을 채우던 기억들. 눈망울이 유난히 반짝이는 마알간 아이가 대청마루 끝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다. 그 아이가 묻는다.

그래, 너는 지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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