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트머리 집

by 남새

40대 후반쯤이었다.

후배가 너싱홈을 개원했는데 병원 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열흘 정도 내게 경영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생각 없이 그러마 했는데 그 열흘이 너무 힘들었다. 노인이 싫었다. 그때의 나는 노인시설에는 절대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나는 요양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40대는 보이는 그대로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기저귀 차고 음식 흘리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그 모습만 보였다. 60을 목전에 둔 지금은 노인들의 전 인생이 한꺼번에 보인다. 노인들 얼굴에 천진한 아이가 있고 피 끓던 청춘이 있고 열심히 살던 중년이 있고 그리고 노인이 된 지금까지. 주름 하나하나에 그들이 보낸 시절들이 켜켜이 쌓여있어 한 분 한 분 다 소중한 인생으로 보였다. 어느 삶인들 희로애락이 없을까? 대부분 여든에서 아흔 전후 어르신들이었는데 평생을 산골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억척스럽게 치열하게 살아내신 분들이었다. 나의 작은 에너지와 사랑으로 잠시나마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감사했다. 몇 명의 어르신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맹숙 할머니)

"아이고~ 사는 게 지겹다"

자리를 옮기거나 심심한 시간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입에 달고 사신다. 백여 명의 어르신 중에 유일하게 긴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계신다. 관리가 힘들어 머리를 자르자고 권유했지만 소용없었다. 목욕 후에 비녀를 잃어버렸다고 몇 번 소동이 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희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비녀를 찾느라 허둥지둥하셨다. 언뜻 중국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설의 고향 생각도 나게 한다. 내가 "백발의 미녀"라는 별명을 지어 드리니 좋아하셨다. 보호사한테 맡겼다고도 하고 간호사한테 맡겼다고도 하시지만 결국 할머니 침대 밑이나 소중한 복주머니 안에서 비녀가 나왔다. 그제야 가지런히 머리를 틀어 올려 낡아서 색도 바랐고 중간중간 긁힌 상처도 많은 하나뿐인 은비녀를 뒷머리에 꽂으셨다. 긴 머리를 고집하시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몇 번을 물어도 말씀을 않으셨다. 그런데 저 비녀를 잃어버리시면 어디서 사야 할까?

맹숙 할머니는 대단히 영리하시다. 아직 인지도 좋으며 부지런하고 눈치도 빠르시다. 하지만 마음 한 곳에 응어리가 있다. 누구라도 옆에 앉을라치면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을 한다.

"자식들이 우리를 여다 버렸다. 죽기 전에는 여서 몬 나간다. 쌔빠지게 안 입고 안 먹고 키워 놓았더니만 지부모를 늙었다고 여다 갖다 내삐맀다.“

귀가 어두운 분이 대부분이고 인지가 약하신 분이 많으시지만 개의치 않고 샐쭉거리며 자식들 욕을 하신다.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해도 비수처럼 꽂힌 원망은 요지부동이다. 직원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화가 풀릴 때까지 조용히 혼잣말처럼 하신다. 다행히 동조하거나 동요하는 분은 없지만 자식들 원망하는 일이 맹숙 할머니의 하루 일과다.

맹숙 할머니가 언젠가 어릴 적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학교가 너무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여자는 살림이나 잘하면 된다고 보내주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 교실 창밖에 매달려서 칠판에 써진 글을 보고 외우고 집에 와서 부지깽이에 묻은 숯으로 연습을 하고 땅바닥에 막대기로 그리면서 스스로 한글을 깨치셨단다. 한글을 익힌 덕분에 시집에서도 무시당하지 않았고 동네 아낙들을 모아놓고 선생처럼 가르쳐 주기도 하여 동네에서도 유식한 아낙으로 인정받기도 했단다. 추억하는 할머니의 눈에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가득했다. 그 말끝에는 늘 그렇듯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자식들이 여기에 갖다 버렸다고 원망과 푸념이 따라온다.


(순이 할머니)

맨 끝 방에서 늘 조용히 바라만 보는 할머니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신다. 말이라도 건네면, "오늘 죽을 란가. 언제 죽겠노. 와이래 안 죽노" 매일 한 번 이상은 하시는 말씀이다. 식사량도 적으시니 힘이 없어 자주 누워계시지만 일으키면 일어나앉으신다.

"어르신 노래 하나 해 주세요~"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 지며는 못 노나니~"

힘이 없고 가쁜 숨 때문에 숨길이 약하고 가늘지만 그 길을 따라 노래를 해 주신다. 부딪히는 숫자보다 어긋나는 숫자가 더 많지만 손뼉도 치신다. 다 약하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린다. 부딪는 손바닥에서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노래를 부르신다. 그나마 조금 남은 힘을 모아 노래하실 때 할머니의 눈에 작은 빛이 난다. 나는 어디서든 할머니가 보이면 박수를 치며 노래를 시작한다. 코에 반쯤 걸친 안경 위로 눈을 맞추고 노래를 하며 할머니의 기운을 돋워 드린다. 노래의 끝에는 내가 언제쯤 죽겠느냐,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빠짐없이 따른다. 100세가 가깝다 보니 형제자매도 친구들도 친척들도 다 돌아가셨다. 다른 어르신들처럼 방을 떠나 산책도 못하시고 겨우 앉았다 누웠다 하시는 게 전부다. 누구를 기다리거나 원망하는 일도 없다. 매일 마지막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신다.

나는 일부러 끝 방으로 자주 간다. 사그라져 가는 삶에, 가는 눈길과 숨길에 잠시라도 활기를 드리고 싶어서.

"어르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순분 할머니)

내가 요양원에 입사하고 입소하신 분이다. 아들과 딸이 함께 왔었는데 할머니의 입소 거부로 두 어 시간 정도 소란이 있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지켜보기만 했으나 결국 가족들은 할머니를 두고 가셨다. 남겨진 할머니의 거부는 완강했다. 방조차 들어가지 않겠다고 집에 가야 한다고 큰 목청과 강한 어투로 요양원을 흔들었다. 다부지게 생긴 몸에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오고 붉었던 할머니는, 투쟁 몇 시간 만에야 침대로 가셨다. 어찌하여 첫 날밤을 보내시고 다음날 아침부터 또 시작되었다. 가방을 싸고 옷을 갈아입고 집에 가야 한다며 고함도 지르기도 하고 애원도 하셨다.

"나를 와 여다 가다 놓노? 우리 큰아들이 알면 가만 안 있을 끼다! 큰아들한테 전화 해도라!"

그 큰아들이 입소시켰는데 말이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며 아무나 붙잡고 집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보내주면 돈을 주겠다고 거래를 시도하기도 하셨다. 당신도 힘들고 우리도 힘든 날을 보냈다. 농사일로 다져진 다부지고 강인한 체력으로 지치지도 않으시더니 열흘 정도 지나자 조금 나아지셨다. 옆 침대의 할머니와 친구도 맺으시고 식사도 잘하셔서 안심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당직 날이었다. 갑자기 옆구리가 아파서 숨을 쉴 수 없다며 복도 바닥에 뒹구셨다. 숨을 가쁘게 쉬면서 “날 진주 병원에 델다 주라!”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이곳저곳 확인을 해보니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가끔씩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하셨던 게 생각났다. 진찰을 하는 척 무심히 반대편으로 관심을 이끄니 아프다던 옆구리를 홱 돌리셨다.

"어르신~ 또 꾀병하셨죠? "

" 하하하하하"

몇 개 남은 누런 앞니를 내놓고 볼 빨갛게 웃으셨다. 그렇게라도 바깥으로 나가면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거다. 큰아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때까지도 믿고 계셨다. 할머니는 지독하게 가난하셨다. 먹을 양식이 없어 뒷산에서 갈비 모아 시장에 팔아 보리쌀 사서 밥해 먹이며 자식들을 키웠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사정은 평생 편치 않아 보였다. 입소하는 날,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을 때 큰소리로 할머니를 누르던 추레한 차림의 큰아들의 생활도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자식들의 사정과 상관없이 내 자식들이 절대 나를 이곳에 버렸을 리 없다고 굳게 믿으셨다. 기억이 사라져 가는 중에도 자식들과 헤어진 이유가 자식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믿고 싶으신 것 같았다.


(순자 할머니)

작고 마른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다. 늘 침상에 누워계시는 분으로 작은 자극에도 아파하신다. 할머니에게는 효자 아들이 있다. 아들은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할머니를 보러 온다. 휠체어를 타고 면회실로 가면 아들은 이것저것 싸온 음식을 할머니께 드린다. 거의 한 시간 동안 대화도 별로 없이 서로 얼굴만 마주 본다. 할머니는 아들이 주는 음식을 곧잘 받아 드시지만 표정은 없으시다. 무표정한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인자한 미소로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던 예전의 그 모습이 아들의 눈에 비칠 것 같다. 아들은 대학교수라고 했다. 부인과 자녀는 외국에 나가 있고 아들이 매주 도시락을 직접 마련해 온다고 했다. 할머니가 병원에 갈 일이라도 있으면 아들이 먼저 병원으로 와서 기다린다. 우리 요양원에서 제일 효자라고 소문이 났다. 어느 당직 날, 우연히 내다본 창밖으로 그 아들이 보였다. 도시락 통을 앞뒤로 흔들며 고개를 빠뜨리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차 문고리를 잡고 잠시 머뭇거리는 아들, 그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봉순 할머니)

반달 모양의 새까만 눈썹 문신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분이다. 뽀얀 얼굴에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걷는 봉순 할머니에게는 소문도 많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이 없다, 유흥가 쪽에서 일했다, 첩으로만 살다가 나중에는 버림받고 혼자가 되었다는 둥 산골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촌로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가끔 요양원으로 봉사단체들이 온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어르신들 흥을 돋우어 주시는데 그때 봉순 할머니는 요양원의 스타가 된다. 간드러진 목소리 하며 박자가 몸에 붙은 듯 하늘거리는 허리와 엉덩이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연상이 된다. 끊임없는 칭찬에 할머니는 이것쯤이야 하는 거만한 표정도 지으신다. 인지가 좋은 편에 속하는 할머니는 요구도 많다. 조금만 불편해도 검은 눈썹을 팔자로 세우고는 죽어가는 시늉을 한다. 무슨 약이든 드셔야 낫는 병은 할머니의 날 좀 봐 달라는 손짓이 대부분이다. 어르신들의 불편 호소는 잘 살펴야 한다. 정말로 아플 때도 있지만 반쯤은 타이레놀 한 알 정도에 포옹과 십여 분 정도의 대화면 충분하다. 봉순 할머니는 욕심이 많아 자주 아프셨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불편을 호소를 할 때마다 반응하고 그 호소로 짐작되는 질병을 예상하고 겁먹었지만 이제는 한 번쯤 의심하고 확인을 한다. 나의 손길이 약이 될 때 나의 자존감에도 약이 발라지고 있었다. 나는 어르신들께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았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다 다르지만 마지막을 함께 보내실 어르신들이다. 조금 일찍 오기도 하고 적당한 때에 오기도 하고 아예 이곳을 모르시는 분도 계신다. 다양한 사연으로 이곳에 오신 어르신은 평생 삶을 통해 가진 기질과 성품대로 요양원 생활을 하신다. 적응을 잘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고, 끝까지 자식들에 대한 원망과 배신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으시는 분도 계신다. 치매가 깊어지면 인지가 남아 있을 때 와 달리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우울증으로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고, 종일 앉아서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집을 찾아 배회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분도 계시고, 보이지 않는 남편에게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망상을 보이는 분도 계신다. 누구든 때리거나 꼬집고, 밥상이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폭력성을 가진 분도 계시고, 매일 아침 집에 가기 위해 보따리를 싸는 분도 계신다. 종일 앓는 소리를 내어 직원들의 원성을 듣는 분도 계시고, 세상에 저런 욕도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욕만 하는 분도 계신다. 말없이 웃기만 하는 순하고 착한 분도 계시고 늘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분도 계신다.

그 어떤 모습도 그들이 원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모른다. 치매는 병이다. 그 행동들은 병에 따른 증상일 뿐이다. 더러 심한 욕을 하거나, 폭력적인 분에게는 잠시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들은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작고 여린 분들이다.


내 손바닥은 유난히 땀이 많이 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손이 촉촉한 날에는 '장마 같은 여자'라 딸은 놀리고 남편은 내 손길에 질겁을 한다. 그런 날은 내 손의 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해할까 봐 악수하는 것도 꺼릴 정도로 손을 조심하는 편이다. 그런데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내 손을 좋아하셨다. 메마르고 거친 손이 가문 논처럼 내 손의 물기를 빨아들인다. 어르신들도 좋고 나도 좋은 손잡기는 상생의 인사가 되었다. 축축한 내 손이 최적의 쓰임새를 찾았다. 또 나는 스킨십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엄마의 손길을 좋아하더니 어른이 되면서는 질척거리지 말라며 피한다. 거절당하기만 하던 스킨십을 요양원에서는 마음껏 한다. 두 팔 벌려 어르신들은 안아주고 손 잡아주고 만져드리면 너무 좋아하신다. 어떤 어르신은 내 손을 잡고 연분홍 잇몸을 드러내며 몸을 흔들고 뺨에다 비비면서 뽀뽀까지 하신다. 손을 잡을 때마다 놓지 않으셔서 애먹을 때도 있다. 하지만 더러 치매가 심한 분은 안아드리려 하면 손사래를 치거나 욕을 하시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이 왜 그러냐고, 나한테 뭐 빼먹으려고 그러느냐고. 상처가 많으신 분이라 짐작을 한다. 대부분은 안아드리고 등을 쓰다듬거나 손을 잡아드리면 무척 평온해하신다. 내 품이 소중한 역할을 찾았다.


어르신들을 보고 있으면 모두가 아기 같다. 단지 모습만 달라졌을 뿐 아기의 행동과 생각이다. 기저귀 차고 누워서 밥을 떠 먹여야 하는 어르신들은 엄마젖 먹고 이유식 먹고 누워 잠자는 아기 같다. 부자연스러워진 몸으로 팔과 다리만 흐느적거리며 추는 춤은 아기들이 음악에 맞춰 무릎과 팔만 흔드는 그것과 같다.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면 안정감을 느끼던 아기처럼 노인들도 그러하다. 보행기를 밀고 다니는 아기나 보행보조기를 밀고 다니는 노인들도 같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나 자식들을 기다리는 노인들도 같다. 맛있는 음식을 들고 아이에게 오는 부모나 부모에게 오는 자식도 같다.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것도 같다. 참지 못하고 고집 피우는 모습도 아기 같다. 노인과 아기는 닮은 점이 참 많다. 모질고 힘들었던 행복하고 보람 있던 그 모든 삶을 다 살아내고 아기 때로 돌아가는 그분들의 삶이 참으로 엄숙하게 보일 때가 있다. 노인이 된다는 건 삶의 행복 불행 고통 인내 사랑 미움 욕심 비움 이기심 배려 등 삶의 희로애락을 다 경험한 후에야 맞을 수 있는 품격 있는 지위이다. 노인이라는 말에는 분명히 존경심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소규모 공동체 등 노인시설은 나날이 그 수가 많아지고 발전하고 있다. 내가 완전한 노인이 될 때쯤이면 노인시설이 보편적인 선택이 될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인식도 많이 달라져 있겠지. 자식들도 더 이상 죄스러운 마음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식들에게 버림받아 가는 곳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영위하기 힘들 때, 보호와 관리를 받으며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으면 좋겠다. 많은 노인 시설 중에서 자신의 상황과 성향에 맞는 시설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그곳이 우울하거나 슬픈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하는 곳! 삶의 끄트머리 집!

태어날 때 축복을 받듯이 마지막 생활을 하는 끄트머리 집도 축복의 장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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