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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힐: 찰나의 흔적, 불가사의한 경계를 걷는 탐험로

게리 힐, 《찰나의 흔적》(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전시 비평

by 도라지 도사

회로-미로:

《게리 힐: 찰나의 흔적》, 불가사의한 경계를 걷는 탐험로


적절한 순간을 포착했을 때 서문은 항로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뒤를 돌아보면 “전진 운동”에 걸려 찰나의 흔적으로 떨어진다.
Gary Hill, “And if the Right Hand Did Not Know What the Left Hand Is Doing,” in Illuminating Video: An Essential Guide to Video Art, ed. Doug Hall and Sally Jo Fifer (New York: Aperture Press/ Bay Area Video Coalition, 1990, 92.
2I2A5952-E Print.jpg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30년 만에 게리 힐은 ‘Momentomb’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가 이 단어를 『비디오 밝히기: 비디오아트 필수 가이드 Illuminating Video: An Essential Guide to Video Art』에서 짧고 모호하게 언급했을 때에도, Momentomb는 움직임이 남기고 간 무언가가 머물 장소를 암시했다. 그리고 한 세기를 지나 2019년,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게리 힐: 찰나의 흔적 Gary Hill: Momentombs》에서 ‘momentomb’는 힐의 작품세계를 여전히 추상적으로 그러나 ‘momentombs’로 복수화 되어 그 수가 늘어난 만큼,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상징으로 거듭났다. ‘Moment(찰나)’, ‘Momentum(가속도)’, ‘Tombs(무덤)’을 합친 단어/전시, ‘Momentombs’는 현상을 포착해 고정시킨 상태인 ‘찰나’와 현상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는 ‘가속도’를 만나게 하는 동시에 그 둘 사이를 구분 짓게 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무덤은 그저 삶에서 벗어나 죽음만이 잠든 어두컴컴한 세계로만 규정될 수 없다. 산 자들은 그리움을 채우거나, 추모하거나, 혹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서 무덤을 찾는다. 죽은 자들은 선물을 보내거나 저주를 내리면서 산 자의 마음이나 욕망, 호기심과 소통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해체하고 상반된 존재들이 끊임없이 섞여 가는 장소가 바로 무덤인 것이다. 게리 힐의 ‘Momentombs’ 역시 마찬가지다. 힐의 작품에서는 서로 어긋나거나 구별되는 대상들과 현상들이 조우한다. 〈자체 제작 과정이 담긴 클라인 병 Klein Bottle with the Image of Its Own Making (2014)〉의 유리병은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클라인 병 형태로, 좌대 위에 고정되어 놓여있다. 병 표면 위로 클라인 병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찍은 순간들이 속도를 내며 지나간다. 우리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제작과정을 눈으로, 또는 카메라 렌즈로 찰나에 포착한다. 〈구석에 몰린 Cornered (2016)〉의 캔버스 속 게리 힐은 스튜디오에서 빛의 왜곡을 실험하던 순간을 되풀이한다. 힐이 캔버스에 갇힌 채 과거의 한 시점만을 반복할 때, 작품과 마주했던 우리들은 모두 미래로 나아간다.


잠시 〈잘려진 모서리는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 낸다 Cutting Corners Creates More Sides (2012)〉의 언어를 빌려오자. 찰나의 흔적 Momentombs이라는 “불가사의한 세계”에서 힐의 작품들은 “사물, 도구, 부분, 조각 나아가 정의하기 어렵고 잊힌 것들의 면면으로” 구성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이상한 세계를 보여주는” “잘려진 모서리”일 뿐이며, 전시장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힐의 목소리는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기 보다는 그 “세계의 단면”을 포착하자마자 “빠르게 해체”된다. 《찰나의 흔적》 전시장은 “어느 길고 검은 정경”이자 미술관과 작가의 “작업대”이다. 그러나 전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파편들을 추적”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필요한 말의 행방”을 찾기 위해, “좁고 검은 ‘런웨이’”를 걸으며 “여분의 더미”에 파묻힌 “용도 불명의 잡동사니들” 속에서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게리 힐의 이번 개인전은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찾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불가사의한 탐험’이 될 수 있다.¹



왼손/오른손은 오른손이 뭘 하는지 알까?²


_JDW2263.jpg <잘린 파이프>, 1992,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찰나의 흔적》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은 1980년대 초부터 2019년까지 폭넓게 분포된다. 20세기기술인 CRT 모니터와 비디오에서부터 21세기의 LCD 디스플레이와 마이크로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와 기술을 넘나드는 작품들은 게리 힐의 세계가 4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숙달된 원숙함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도전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직접 만든 소리를 테이프 루프에 녹음하고 그것을 다시 이어 붙이며 끝없는 회로를 만들던 청년 힐은 비디오를 발견한 뒤 비로소 자신을 전자회로에 놓을 수 있었다. 마치 서퍼가 파도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듯.


서퍼는 바다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서핑보드에 몸을 맡긴다. 힐 역시 전자 매체에 자신을 맡긴 채 바다라는 거대한 회로에 뛰어들어 사유를 확장하고 연결한다. 서퍼가 다양한 서핑보드로 파도의 흐름과 인간의 합일을 실험하는 것처럼 힐은 비디오와 마이크로 카메라, 컴퓨터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 자신이 서퍼이기에 파도가 만들어지다 사라지는 순환을 체감하는 데 흠뻑 취했던 것일까. 힐의 작품들은 어떤 경계가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순간을 주목한다.


이번 개인전은 전시실 2,4,5라는 공간적 구분이 있지만 그 공간은 특정한 주제나 연대기에 따른 섹션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세 전시실 사이의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작품들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렇기에 길이 만들어진다. 《찰나의 흔적》의 첫 막을 여는 전시실 2에는 커다란 방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왼쪽 혹은 오른쪽을 선택해서 가로막힌 방 틈새를 가로질러 탐험을 시작한다.


당신이 왼쪽으로 먼저 나아가길 선택했다면 신체와 언어, 소리로 가득한 길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힐이 작품 초기부터 관심을 두던 요소였다. 힐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전자매체가 이용자 스스로가 이미지와 소리를 만들고 기록할 수 있었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라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이 세 가지 요소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신체는 시각적으로 포착되는 한편 언어와 소리는 청각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동시에 신체와 언어/소리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잘린 파이프 Cut Pipe (1992)〉에서 손이 스피커를 더듬어갈 때마다 힐의 음성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양면적인 (염소와 양) Twofold (Goat and Sheep) (1995/2002)〉에서 움직이는 손은 힐이 음성으로 읊는 동화를 설명한다. 〈셀프 ( ) 시리즈 SELF ( ) series (2016)〉에 이르면 찰칵거리는 기계음이 신체를 조각나는 순간을 알려준다. 신체는 완성되지 않고 조각난 채, 알 수 없는 의미를 전하려는 소리만이 남는다.


2O7A0928.jpg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반대로 오른쪽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범람하는 파도처럼 고요하게 서로서로 연결된다. 〈구석에 몰린〉과 〈정현곡선 (생명의 곡선) Sine Wave (the curve of life) (2011)〉은 경계를 확장하고 해체하는 실험이다. 평면 회화에서 사용되는 2차원 캔버스는 사각형 단면 형태에서 벗어나 꾸물꾸물 움직인다. 〈구석에 몰린〉은 삼각형과 사각형 캔버스가 모퉁이 벽면 두 곳에 놓여 ‘구석’에서 만난다. 힐은 나뉘어진 캔버스를 넘나들고 우리와 자신의 모습을 겹쳐 놓는다. 그 행위는 평면에서 입체로, 자신이 존재하는 스튜디오에서 우리들이 머무는 전시장으로, 한정적으로 촬영된 과거의 시간과 유동하는 현재의 시간이라는, 중첩된 시공간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이다. 〈정현곡선〉에서는 동그랗게 왜곡된 캔버스가 유리잔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유리잔을 직접 짊어 매고 가는 듯한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는 이미지가 아닌 우리의 머리 위에서 내리 꽂힌다. 힐의 들숨과 날숨이 우리의 숨소리와 섞인다. 〈구석의 몰린〉에서 우리의 시야 바로 앞에서 힐의 모습이 겹쳐졌다면, 〈정현곡선〉에서 힐의 존재는 우리가 서있는 바로 그 위치에서 겹쳐진다.


유리잔 속의 물은 숲을 집어삼키고 바다로 확장된다. 당신이 오른쪽 길을 먼저 선택했든 왼쪽길을 선택했든 미로의 끝은 너른 모래 사장이다. 각각의 길목은 왼손잡이용 책상과 오른손잡이용 책상을 기점으로 합쳐진다. 〈학습곡선 Learing Curve (1993) 〉과 〈학습곡선 (정지점) Learning Curve (still point) (1993)〉의. 모래사장 같은 커다란 책상의 끝에서는 크고 작은 파도가 소용돌이친다. 〈감각차단실 Isolation Tank (2010-2011)〉의 거대한 바다는 두 작품의 파도를 집어 삼킨다. 이윽고 바다 너머로 게리 힐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감각 차단실〉에서 둥둥 떠다니는 서핑보드 위로 살아있는 인간인 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찰나의 순간 그 얼굴은 해골을 짊어진 죽음의 신, 마하칼라의 얼굴로 변한다. 〈벽면 작품 Wall Piece (2000)〉에서는 번쩍이는 스트로브 조명으로 〈난제 Conundrum (1995-1998)〉에서는 가속도가 붙는 시퀀스를 타고, 힐의 모습은 우리의 사고를 자극한 뒤 흩어지곤 한다. 1층 전시실 가득 작가의 목소리와 숨소리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거나, 일부만(신체의 단면, 목소리, 숨소리) 등장하거나, 다른 요소들(빛 또는 시간)로 가려지기에 힐의 모습을 명확하게 마주한 이는 드물다. 이제 드디어 작가와 온전히 마주할 시간이 온 것이다.


계단을 밟으며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길목에 시선을 던진 순간, 우리는 힐과 전면으로 마주한다. (누군가 운이 좋다면 무엇을 밝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화면을 먼저 마주할 지도 모른다. 14분 가운데 얼마간의 확률을 얻었다면, 당신의 침입에 반응하듯 모습을 드러낸 작가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화면 가득 자리 잡은 힐은 왼손으로 동전을 튕겨 올리고 허공에서 동전을 잡아 손등에 올린다. 여전히 힐은 갇혀 있지만 더 이상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 장소는 벽면과 CRT 모니터에서 초대형 LED 모니터로 진화하는 동안 힐은 전자회로에 완전히 녹아든 듯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 순간 그는 미술관의 〈장소의 주인 Place Holder (2019)〉이 되어 마치 탐험가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처럼 우리를 관조한다.


_JDW1753.jpg <장소의 주인>, 2019,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어떤 벽이든 어떤 방이든 이상할 뿐이지³


전시실 4와 5로 구성된 2층은 고요하다. CRT 모니터와 레이저디스크 플레이어에서 빔 프로젝터, 초소형 카메라와 초대형 LED 스크린까지. 흰 벽과 흰 캔버스는 물론, 나무 책상과 유리병, 그리고 잘린 파이프까지, 시간과 용도를 넘나드는 오브제로 가득했던 1층과는 다른 모습이다. 전시실 4는 오직 끝없이 되풀이되는 에릭 사티(Eric Satie)의 ‘벡사시옹 Vexations’만이 공간 가득 흐른다. ‘장소의 주인’인 힐의 허가를 얻어낸 보상일까? 작가의 사적인 내면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2층 전시실들의 고요함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소설 『최후의 인간 Le Dernier homme』의 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양병원, 그곳은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의 경계 위에 놓인 공간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삶을 부유하다 죽음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에 대해 생각한다. 그와 비슷하게 현실의 우리들은 전시장 2층에 올라선 순간 창 너머 기울어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게리 힐/죽음의 신을 전제로 두게 된다. 그리고 전시장 벽을 장식하거나 방 속에 영면하고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고, 작품에 나타난 사람과 사물, 기억과 관계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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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 <주의>, <다 큰 다리는 울지 않는다> , <한 숟가락 가득>,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전시실 4에서 불멸(죽음)과 필멸(삶)은 고정됨과 움직임이 되어서 경계를 이룬다. 벽 한 면에 자리잡은 〈석궁 Crossbow (1999)〉은 무덤 앞 십자가처럼 모니터의 전선과 콘센트, 멀티탭들이 길게 늘어져 선과 면적을 이룬다. 왼손과 오른손은 유서를 쓰는 것처럼 혹은 방문자를 기록해가는 것처럼 공책에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석궁〉의 모니터는 중앙의 머리 부분 아래로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자리잡고 있지만, 왼손과 오른손은 화면의 경계를 넘나들며 왼손/오른손이 하는 일에 개입한다. 힐이 〈양면적인〉에서 음성으로 왼손과 오른손의 경계를 노래한 것에 이어 〈석궁〉에서 그 경계는 이미지로 나타나며 넘나든다.


석궁과 마주보고 있는 세 작품 역시 현실과 사후세계의 경계를 뒤흔들 듯 상식과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주의 Attention (2005)〉, 〈다 큰 다리는 울지 않는다 Big Legs Don't Cry (2005)〉, 〈한 숟가락 가득 Spoonful (2005)〉. 작장난감 발사나무 글라이더가 방수포로 만든 텐트를 통과할 틈을 노린다. 펼쳐진 책들이 손이 아닌, 읽는 행위와 상관없는 다리를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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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호흡법>, 1995, <관람자>, 1996,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순환호흡법 Circular Breathing (1994)〉의 이미지는 리듬에 맞춰 미끄러지고 순환된다. 죽음을 앞두고 펼쳐지는 삶의 파노라마처럼 〈순환호흡법〉은 힐의 사적인 기록을 계속해서 순차적으로 늘어놓는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 탕헤르 거리의 이미지, 책 읽는 소녀와 나이 든 여자, 나무를 자르는 남자, 재떨이의 담배 …. 힐이 여행하던 장소들의 기억이자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등장한다. 그 너머 벽에는 17명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관람자 Viewer (1996)〉이 되어 서 있다. 이들은 〈순환호흡법〉에서 흐르는 작가의 내면을 바라본다. 혹은 작품으로 남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을 함께 응시하는 것처럼.



누군가 방 안에 있다⁴


2I2A5964.jpg <손으로 듣는>, 1995-1996,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관람자들이 되어 관람객인 우리를, 혹은 그 너머로 작품들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전시실 5에서도 이어진다. 〈손으로 듣는 Hand HearD (1995-1996)〉 사람들은 뒤돌아서 손을 응시하고 있다. 이들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벽은 전시실의 구석이자, 어떤 작품이 잠든 방의 부분이기도 하다. 각각이 보고 있는 손은 각자 자신의 손이라기에는 크기나 피부 색, 주름의 정도가 얼굴에서 느껴지는 나이와는 상이하다. 더욱 기묘한 점은 뒷모습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얼굴 방향이 손과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말로 손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벽 저 너머, 방 저 너머의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을까?


2O7A1031.jpg <폭뢰>, 2009/2012,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어떤 방이든 어떤 벽이든 이상할 뿐이지만, 누군가 존재하는 방은 더욱 기묘하다. 커다란 벽 가득 회색빛으로 펼쳐졌던 〈순환호흡법〉을 지나면 커다란 〈폭뢰 Depth Charge (2009/2012)〉의 방에 이른다. 바닥에는 포탄의 흔적처럼 모니터와 전선들이 흩어져 있다. 벽면에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형태를 이룬 전자파동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베일을 쓴 마리아 앞에서 한 남자가 전자기타를 연주한다. 이미 플레이리스트는 반복적인 ‘벡사시옹’에서 전자음으로 변안된 ‘검은 죽음 Un Grand Sommeil Noir’으로 넘겨졌다. 관조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는 혹은 죄를 고하는 남성의 관계는 바닥에 흩어진 모니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힐은 LSD에 잔뜩 취해 환각상태에 빠져 현실과 향정신적 상태의 경계를 오간다. 누군가 카메라로 그 모습을 촬영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힐이 사랑이 뭔지 물을 때, 우리들은 관음증에 걸린 사람 마냥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를 훔쳐보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힐은 계속해서 카메라 너머 “스윗텍스트 SWEETTEX”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환각 상태에 사로잡힌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종종 부르주아를 저주한다. 힐이 자신의 내면을 고백할 때 깔깔거리는 높은 웃음소리가 지나간다.


_JDW1588.jpg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 1991-1992,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힐의 내면이 폭발한 뒤 남은 잔상으로 구성된 〈폭뢰〉는 다채롭고 정력적이다. 〈폭뢰〉에서 힐이 탐험하는 경계는 살아 있는 자의 정신세계이다. 그런데 십 몇 년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보다 힐이 훨씬 젊었을 때 의 작품인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 I Believe It Is an Image in Light of the Other (1991-1992)〉는 삶과 죽음을 고찰한다. 『최후의 인간』을 구현한 이 작품에서 힐은 죽음을 앞둔, 소설 속 교수가 되어 우리를 맞이한다. 커다란 방 안에서 꾹 다문 눈과 입, 어루만지는 손 등 소설 속에서 언급된 신체 조각들이 무수하게 쌓인 책 위를 떠다닌다. 힐은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된 채 유일한 무생물 오브제인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것 같다. 우리가 방 안에 들어와 그가 만든 어둠 안에서 빛이 된 이미지를 마주하는 순간을. 전시 제목, “찰나의 흔적 Momentombs”에 담긴 의미가 다시 한번 되풀이된다. 부유하는 신체들은 삶과 죽음의 ‘찰나’가 낳은 ‘흔적’으로, ‘무덤’과도 같은 작품에서 ‘가속도’를 내며 계속해 움직인다. 신체의 움직임이 책 위에 인쇄된 문장들과 겹쳐질 때마다,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다.



우리는 그저 서 있기만 할 순 없다⁵


〈손으로 듣는〉은 〈폭뢰〉와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라는, 힐의 내면을 감춘 두 개의 묘실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외벽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손으로 듣는〉 사람들의 손과 시선을 지표로 삼고 나아가는 동안, 모니터와 책 파편들 위로 적나라하게 투사된 힐의 무의식을 체험했다. 작가의 개인전에서 작품들의 수많은 은유를 뚫고 그의 내면과 만났다면, 우리는 이야기의 절정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탐험의 끝이 다가온다.


2O7A1049-E2 Print.jpg <잘려진 모서리는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낸다>, 2012,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의 방을 나온 순간, 우리는 새까만 어둠과 새하얀 빛의 경계 앞에 선다. 〈잘려진 모서리는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낸다〉와 〈원초적인 말하기〉가 전시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다. 〈잘려진 모서리는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낸다〉는 《찰나의 흔적》이라는 길고 검은 “런웨이” 끝자락에 위치한다. 이 작품 바로 옆에는 미술관 내부 조명과 자연광이 어우러진 새하얀 빛이 출구를 암시한다. 출구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원초적 말하기〉가 전시를 마무리한다.


두 작품은 힐의 작품 세계를 압축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1980년대 초부터 2012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장난감이던 비디오가 낡은 감옥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고, 오래된 시작점이었던 조각을 회고하면서 최신 기술이 결합된 클라인 병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간이 흐를수록 매체가 가속도를 받아 변화하는 지점들, 즉 〈원초적인 말하기〉의 불룩한 CRT 모니터가 납작한 LCD 모니터로 이어지는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_JDW1556.jpg <원초적인 말하기>, 1981-1983, ≪게리 힐: 찰나의 흔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 2019 (사진: 우종덕)


〈원초적인 말하기〉는 《찰나의 흔적》의 전시작들이 저마다 이야기하던 신체와 파편, 언어, 시간, 이미지를 모두 예고하고 있다. 신체 단면들, 정지하고 움직이는 사물들의 대비, 언어 음절음절에 맞춰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가속도를 타고 여덟 개의 모니터 너머로 흐른다. 〈잘려진 모서리는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낸다〉는 〈원초적인 말하기〉에서 숨겨졌던 스피커와 프로젝터가 노출되는 반면, 보여주는 이미지는 불투명/모호해진다. 이미지는 여전히 음절에 맞추어 달라지지만, 사물 단면의 변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과 초점으로 나아간다.


〈원초적으로 말하기〉에서 게리 힐은 시간을 건너 미래에 무언가를 만나리라 약속한다. 30여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미래가 된 지금, 우리는 힐의 개인전 《찰나의 흔적》에서 만나게 되는 ‘무언가’를 뚜렷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힐이 끊임없이 경계를 해체한 뒤 남은 흔적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상상과 재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새까만 테이블 위에서 디지털 세계에서 검정과 흰색의 경계는 회색이 아니다. 모든 색상의 경계를 표현할 수 있는 RGB 혹은 CMYK이다. “블루 그린 레드 시안 마젠타 옐로우 Blue Green Red Cyan Magenta Yellow” 힐이 전자회로로 이미지와 언어의 경계를 흩트려 두면, 우리는 그 미로를 탐험한다.




¹ 이 문단은 〈잘려진 모서리는 더 많은 측면을 만들어 낸다〉의 전시 설명을 인용하여 구성했다. 게리 힐, 「작품설명: 게리 힐의 텍스트」, 『게리 힐: 찰나의 흔적』 도록, 수원시립미술관, 2020, 172.

² 첫 번째 소제목은 〈양면적인〉 음성 텍스트를 인용했다. “Twofold (Goats and Sheep),” Work, GARY HILL, https://garyhill.com/work/mixed_media_installation/twofold-goats-and-sheep.html.

³ 두 번째 소제목은 〈폭뢰〉의 음성 텍스트를 인용했다. “Depth Charge,” Work, GARY HILL, https://garyhill.com/work/mixed_media_installation/depth-charge.html.

⁴ 세 번째 소제목은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의 책에 새겨진 문장을 인용했다. 힐은 책의 문장들을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의 『최후의 인간』에서 가져왔다. Maurice Blachot, The Last Man, trans. Lydia Davi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7)

⁵ 네 번째 소제목은 〈원초적 말하기의〉 음성 텍스트를 인용했다. “Primarily Speaking,” Work, GARY HILL, https://garyhill.com/work/mixed_media_installation/primarily-speaking-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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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wrm 후원으로 Apepper books에서 발간된 작고 짧은 책, 『회로-미로: 《게리 힐: 찰나의 흔적》, 불가사의한 경계를 걷는 탐험로』의 글을 업로드합니다. 역사학계를 떠나 (흑흑흑흑흑흑!) 처음으로 쓴 미술 글쓰기네요. 아페퍼의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글이 구현되었답니다.


지난 직장 계약 종료 후 당분간 꾸준히 글을 쓰겠다는 장대한 계획과 달리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백수가 되었거든요. 삶은 살아가는 데 돈이 들기도 하고 좋은 기회가 닿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이전 글을 세이브 삼아 업로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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