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라지밭

평화문해력, 넋과 죄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기술技術/記述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 [쉰일곱 번째 뉴스레터]

by 도라지 도사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쉰일곱 번째 뉴스레터]

평화문해력, 넋과 죄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기술技術/記述



1945년, 종전에 힘입어 광복을 맞이한 민족에게 ‘평화’는 기쁘지만 당혹스럽다. 평화는 강력한 사랑의 단어이자 속박의 단어로, 모든 폭력을 거부한다. 억압과 배제, 차별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도록.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미 새겨진 상처와 분노는 어떻게 다룰까? 우리는 트라우마에 대항하여 권력을 공격하려고 애쓰지만 막막하게도 벽을 부술 길이 없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분노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더 약한 존재들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평화 문해력’ 개념을 창안한 인물로 알려진 폴 K. 체팰은 되풀이되는 폭력의 과녁을 맞이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채펠에게는 한국 광복과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역사의 상흔이 가득하다. 그는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흑인과 백인 혼혈 미군 아버지와 전쟁으로 일본에 거주했던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나,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던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혼혈에 가해진 차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퇴학과 정학 위기를 반복해왔으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이라크 전쟁에 참여했다. 인간의 폭력성과 평화를 향한 질문을 심화시켜간 이래, 전역 후 ‘평화 문해력( Peace Literacy)’ 개념을 발전시켜 평화운동가로 활동한다.


채펠은 평화문해력을 “인간다움을 깊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삶을 충만하게 하고 평화를 지속하기 위한 체계를 제공”한다고 정의한다. 그는 평화문해력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대하며 괴롭힘을 비롯해 다른 형태의 공격들에 대안을 찾는” 기술을 익혀 “세상과 공동체가 더욱 안전하고 나아지는” 데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1) 즉, ‘평화 문해력’은 수많은 구조적인 불의에도 우리가 냉소와 절망에 갇히지 않고 자존감이나 유대감 등 내면의 욕구를 정확히 이해하며 희망을 지속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기술이다.


IMG_7922.jpg ≪평화문해력≫, 2025, 소현문. 전시전경.


2025년 봄, 소현문에서는 ≪평화문해력≫이 열렸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전시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평화운동인 두 지점, 3·1만세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의 날에 열고 닫는다. 백필균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김재홍, 이겨례, 최지인, 현승의가 작가로 참여했으며, 윤리교사 김성희가 서문을 썼다. 채펠의 ‘평화문해력’이 동명의 전시에 직접적인 영감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김성희의 서문은 지구 반대편에서 활발하게 전해지는 가치가 겹쳐지는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며 같은 곳을 향해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는 한강의 「빛과 실」을 인용하며 예술이 “직접적 폭력과 사회 속의 구조적 폭력, 이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을 부여”하기에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인 평화 문해력은, 정치·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문화·생태적인 차원 등으로 확장되는 적극적 평화의 길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2) 이에 답하듯 소현문은 전시를 소개하며 “역사를 성찰하고 문제를 마주하는 평화 문해력으로 시대 감각에 접속”하고자 한다.3) 이 글은 전시에서 드러나지 않는 최지인의 시를 추적하며 김재홍, 이겨례, 현승의의 드러난 회화를 바라본다. 이미지로만 가득한 미술 전시, 심지어 문장으로 엮어내기 힘든 회화들로 한가득 구성된 ≪평화문해력≫에서 써내려갔던 역사를 읽어가고 그에 얽힌 평화를 향한 마음을 상상하는 이야기이다.



보내버린 시간을 애도하며4)


소현문 1층 전시공간은 지면 아래로 조금 내려앉은 구조다. 최지인의 시 제목을 빌리자면, 관람객은 땅의 경계를 훑는 “두더지”가 되어 전시장을 맴돈다. 그는 이 시에서 누군가의 말을 기록한다. “밑바탕이 무너지고 있다.” ≪평화문해력≫은 공간에 따라 섹션을 구분하지 않음에도 이 곳에 놓인 작품들은 시인의 문장처럼 밑바탕이 무너진 자연지대에서 돋아나고 부유하는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나는 언제나 시를 오독하는 편이라 조심스럽지만, “지구를 떠난 에너지 과잉들” 사이로 지난 날의 꿈을 지나 “어쩔 수 없는 마음”과 함께 사건 사이로 희생된 존재들을 애도하다가도 슬픔을 뒤로 한 채 숨어들었다 다시금 불의에 소리내어 지대를 구멍내는 우리들의 모습은 1층에서 만나는 작품들과 닮았다. 세 작가는 저마다 땅과 강, 바다, 능선 곳곳에서 이미 역사로 새겨졌거나 아직 역사로 남지 못했던 사건들을 사실에 비껴가지 않고 변주하거나 은유를 덧씌워 응시한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시간을 쌓아올린 그림들은 “확성기가 침묵의 끝에 닿을 때 천둥 쳤다”고 읊는 시구와 공명한다.



IMG_7912.jpg 현승의, <징조들>, 2023, 장지에 혼합매체, 각 130 × 194 cm, 3폭.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시작은 바다로부터 나아간다. 전시 공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이 닿는 현승의의 <징조들>(2023)은 일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한다는 소식이 전세계로 뻗어나간 이후 바다 면면들을 담아낸다. 먹히거나 숨쉬는 생물들, 소금 포대, 보도화면, 마시고 일하거나 모의하는 손들, 고요히 울렁이거나 거세게 굽이치는 파도 등 확대되고 잘려나간 화면들은 선명하게 묘사되고 희뿌옇게 덮였다. 지나간 역사를 기록한 뉴스들의 열화된 이미지 같기도, 아무도 관심없어 방치된 관제실의 먼지낀 모니터 같기도 하다. 특정 사건의 여파라고 지명하지 않았기에 이 작업은 우리가 과거에 이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바다를 망쳐 왔던 증후들, 그리고 미래에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조짐들까지 아우른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세계 권력은 경제 이윤을 빌미로 쉽게 침묵하기로 합의했다. 1980년대 양산의 고리원자력발전기 폐기물 유출부터 바로 작년에 일어난 월성핵발전소 냉각수 유출까지 한국에서도 일반인에게 영향갈 정도는 아니라는 변명과 관리 기준에 따라 희석한다는 근거로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바다로 방출된다. 최지인이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하고 돌이키듯, 타국이 저질렀기에 쉽게 비난했던 일이 우리에게 닿을 때 <징조들>은 또다시 드러날 것이다. 장지를 가득 메운 검정 농담은 바다를 가득 메운 검은 기름 때와 잿빛 오염수를 무겁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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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례, <코>, 2019; 현승의, <Scenery for You 2>, 2024; 이겨례, <사람들>, 2025; <흐르는 강>, 2024; <토요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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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자진>, 2024; <거인의 잠 - 장막>, 2025; 이겨례, <흐르는 강>, 2024; 김재홍, <민들레>, 1996


세상 일로 복잡한 <징조들>과 대비되어 현승의의 다른 작품 <Scenery for You 2>(2024)와 이겨례의 <코>(2019)는 바다 속 기억들을 고요하게 떠올린다. 푸른 수면 위로 숨들이 희미하게 방울방울 기포가 되어 드러나는 가운데 하얀 코가 빼꼼히 보인다. 동시에 그 코는 가라앉아가는 배를 떠올리게 한다.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코>는 사건을 겪고 지켜 본 이들 모두가 사라진 뒤 수 백년이 흘러 바래지고 훼손될지 언정 남아 있을 기록으로 애도하는 마음을 보존하는 사료로 남는다. <Scenery for You 2> 또한 그럴 것이다. 제주의 야자수는 이국적인 자연을 조성하기 위해 들여온 외래종이지만 강풍과 태풍이 잦은 날씨에 안전 사고를 일으키는 골칫덩이로 취급받는다. 자생종인 배추흰나비처럼 보이는 나비와 외래종인 야자수가 인위적으로 만나 변하지 않을 바다를 맞이하는 풍경은 미래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지 점치며, 당신을 위한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왔는지 환기시키는 기록이 된다.


바다는 강으로 이어지고 땅에 닿는다. 이겨례의 <흐르는 강>(2022-2023) 연작에서 파랗고 흰 색의 경계는 배경을 이루는 강과 산맥의 경계처럼 뚜렷해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로 겹쳐진 물감 너머 드러나는 엷고 짙은 색들 마냥, 무엇이 풀이고 무엇이 흙이고 무엇이 자갈이고 무엇이 흙과 자갈 사이 고인 물방울인지 모호한 너머로 아버지와 작가 자신의 경계 역시 분명 다르지만 교차되는 경험들을 끌어안기에 쉽사리 구분될 수 없는 세대 경계다. 그의 신작 <토요일>(2025)과 <사람들>(2025) 또한 역사를 휘감는다. 땅을 딛고 서서 걷는 군중들은 삶을 위해, 일상을 위해, 정의를 위해 무리 짓는다. 관람객이 저마다 가치를 가지고 상상하면서도 오독하지 않도록 하는 ≪평화문해력≫은 이겨례, 현승의의 작품과 김재홍의 작품이 더불어져 온전하게 뿌리내린다. 김재홍의 <자진>(2024)과 <거인의 잠 - 장막>(2025)에서 능선 같은 남자의 육신 사이로 포탄의 화마가 끓어오른다. 20세기 내내 한국을 포함해 크고 작은 규모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들은 지역만 이동할 뿐 21세기에도 시시각각 벌어진다. 일찍이 작가가 다른 작품 <가보세가보세-일포륜>(1997)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반복된다는 예언일까? 만약 그렇다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무자비한 재난과 권력의 거센 횡포로 타오를지라도, 연약하게 계속해서 흩날리고 꽃 피는 민들레처럼 민중들은 뿌리 뽑혀 흩어지더라도 어딘가에서 뿌리내려 땅을 일구고 저항하는 정신을 바람 사이로 전해왔다. 벽에 단단히 고정된 화마와 수레바퀴와 대조적으로 창틀에 툭 놓인 <민들레(2)>(1996)는 진한 색채와 명백한 형상으로 어떤 곳이더라도 뿌리내릴 수 있는 희망을 건넨다.


(...)



1) Paul K. Chappell, What is Peace Literacy?, Nuclear Age Peace Foundation, (2017), 4. https://www.wagingpeace.org/wp-content/uploads/2017/04/peace_literacy_2017.pdf (2025년 5월 20일 검색).

2) 김성희, 「평화 문해력 탐구,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 찾기_소현문 ≪평화문해력≫ 전시에 보내는 글」https://sites.google.com/view/sohyunmun/text/writing_peace-literacy(2025년 5월 20일 검색).

3) ≪평화문해력≫, 소현문https://sites.google.com/view/sohyunmun/program/peace-literacy(2025년 5월 20일 검색).

4) 최지인, 「두더지」,『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43. 해당 소제목으로 묶인 문장들 가운데 최지인 시의 인용구는 모두 이 시에서 가져와 별도 주를 생략한다.



감사한 기회로 올해부터 미술비평 컬렉티브 에포케 레테(epoché rete)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첫 글을 발행했습니다� 올 상반기에 관람했던 여러 전시 가운데서도, 역사 전공자에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던 소현문의 ≪평화문해력≫을 이야기했습니다. 전공자가 아님에도 미술계라는 곳에 계속 남아서 일하며 어떤 가치를 찾고 싶은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데요. 소현문의 지난 전시처럼, 역사로 행동하기를 종종 마주하기 때문이 아닐까 돌아보며 써내려갔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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