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Illustrierte Technik für Jeder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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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서는 타이피스트를 규정한다. “타이피스트도 쓰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위한 타자기이다.” (「글쓰기의 몸짓」, 『몸짓들』, 34.) 타이피스트 역시 스스로를 매체화했다. 1931년 신문 『잘츠부르크 파수꾼』에서 마르타 슈미트 Martha Schmidt 라는 여성은 손과 팔, 어깨, 눈, 신경계까지 타자기와 연결되었을 때의 신체 움직임과 감각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1943년 하이데거는 타자기를 경계한다. “[타자기는] 인간에게서 손의 본질적 지위를 빼앗는다.” (「손과 타자기에 대하여」, 『축음기, 영화, 타자기』, 359.)
명철한 극우 철학가에 따르면, 타자기는 인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글 쓰는 손의 지위를 빼앗고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관계”를 전환시켰다. 그의 통찰은 정확했다. 타자기가 여성해방을 이끌었다는 키틀러의 분석을 떠올리자. 20세기 초 소녀들은 짧은 직업교육을 수료하고 회사, 교수, 예술가를 위한 타자기로 파견되어, 고용주들의 지성과 감성, 재치를 흡수했다. 마르타 슈미트는 ‘글쓰는 매체’인 자신의 신체를 낱낱이 해부한 끝에 ‘글쓰는 주체’가 되어 타이피스트의 고질적 질병들을 폭로하고 대책을 주장했다. 직업을 구하던 수많은 여성들이 타이피스트로 살아가기 시작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매체이자 주체로서 자기 흔적을 새겨 넣었다. 여성(신체)이 타자기(매체)와 결합하여 보여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상상하기. 리딩투게더에서 반세기 간격을 둔 두 글을 동시에 읽으며 이전에는 관심 갖지 않던 존재들에 몰두하고 세계를 확장시킬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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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코리아나미술관 c-lab에서 랩메이트로 활동하며 참여했던 프로그램에서 하이데거의 「손과 타자기에 대하여」(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발췌)와 플루서의 『몸짓들』을 함께 읽고 짧은 글을 썼다. 역사 공부를 하다 미디어 전시를 보조하는 일을 시작으로, 소위 '미술계'라고 불리는 곳에서 생계를 유지해오면서 기술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20세기 초 기술을 분석하는 글에서부터 출발하여 21세기 동시대 미술에서 다뤄지는 기술까지 나아가는 일련의 프로그램을 관찰했던 시간은 전환점이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묻어 두지 않고 다시 꺼내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보여 일하는 틈틈히 조금씩 다시 실마리들을 찾아가는 중이다.
"'소녀'가 전문적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용주 대부분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1931년 『찰츠부르거 바흐트 Salzburger Wacht』에 게재된 기사, 「타자기에서」를 읽고 있다. 타자수의 저평가된 업무 능력과 타자기 기술 발전으로 인한 타자수 질환 개선을 중심으로 한 노동 문제를 다루는 기사인데, 비슷한 시기에 『아름다운 여성 Die schöne Frau』의 여비서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자기 발견의 긍정성과 명랑하고 유쾌한 톤는 상반된 논조라 더욱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어쨋거나, 사무실 재고목록의 일부로 취급받던 여성들이 자신을 틀에 가두는 기술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은 얼마나 멋진지!
개인적으로 한 가지 눈여겨 보는 점은 「타자기에서」가 라디오 강연을 발췌했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라디오?」, 『大地의 저주받은 걸들』
작년 연간 모노켈은 전직장 동료들을 모아 가벼운 진 형태로 잡지를 발간했다. 여러 겹의 레이어를 덧씌워서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사이로 실었던 라디오에 관한 짧은 만화와 사료들은 1920-30년대 라디오라는 신기술이 열어두는 동시에 속박하는 여성들을 잠깐 비추면서 과거에 새로웠을 기술에 엮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결국 이 궁금증이 어디로 날 데려갈지 모르지만(지금 가장 명확한 건 실직의 길),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사학과의 진부한 격언을 떠올린다면 결말이 나오지 않고 미래에 되풀이될 이야기들만 얻어가더라도 어떤 의미를 찾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