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빈에게 쓰다 57

57 자전적 에세이를 쓰는 데 작업실은 필요 없다

by 블랙빈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자기 절제력뿐이다.(p291)


한때는 글을 쓰기 위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뜨거운 열망이나,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낼 자기 절제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도 높은 문장을 빚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거창한 자격이나 화려한 도구, 혹은 완벽하게 구비된 나만의 장소가 갖춰지길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필수라고 믿었던 그 간절함이나 환경들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는 '선택적 도구'일뿐, 결코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열망이 사그라지고 절제력이 무너져 내린 날에도 글은 써진다. 햇살이 잘 드는 근사한 작업실이나 고즈넉한 나만의 요새가 없어도 문장은 이어진다. 필요한 것은 거창한 조건이 아니라, 오직 ‘시간’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단어들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시간. 어두운 탄광 속에서 보석을 찾기 위해 갱도로 들어가는 광부처럼 내 마음의 길을 파고 들어가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될 단어들을 가만히 들여다볼 그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마주한 단어를 정성껏 옮겨 적고,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을 성실히 받아 적는 일. 심연에 숨은 것을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낱말들이 수면 위로 스스로 떠오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간들이 모여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비로소 하나의 글이 된다.


결국 글쓰기란 내 안의 소리를 듣고 또 들어주는 '절대적인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지금 허기진 것이 나의 몸인지 아니면 영혼인지 살피는 시간과 내가 정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 안의 비명이 기쁨의 비명인지 놀람의 비명인지 세밀하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로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때로는 나를 완전히 비워내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한다. 때로는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때로는 흐르는 세월에 쫓겨 파도에 휩쓸려 보기도 해야 한다. 그 모든 불규칙한 '시간의 결'들이 켜켜이 쌓여 비로소 나만의 문장이 된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장비나 그럴듯한 환경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다시 채우며, 오직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씩 알아간다. 세상 그 무엇보다 나만을 지독하게 편애하는 나만의 시간. 글쓰기는 바로 그 시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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