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펜의 팬이 되다.
연필로 필사적 사랑법을 구사하며 하루를 매혹적으로 살아가는 작가 양철주 님을 『종이 위의 산책자』에서 만났다.
작가로 하여금 필사적 사랑을 하게 하는 연필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 추앙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역시 만년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작가처럼 빈티지한 연필을 찾고 구하지는 않지만 나또한 나에게 맞는, 내 글씨가 좀 더 예쁘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만년필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구입했던 파카에서 선물받은 워터맨을 거쳐 남편의 몽블랑에서 다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필만년필까지 나에게 맞는 필감을 찾기 위해 긴 시간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2017년에 찾아 낸 것이 1.1 켈리 촉이 장착된 라미 조이 만년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애정하는 것은 라미 만년필의 캘리 1.1촉이다. 우연하게 알게 되어 성경 전 권을 필사하게 만들어 준 라미펜 캘리 1.1 촉의 팬이 되었다. 그 촉으로 필사적 사랑에 빠져 손가락 건초염을 앓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나는 열성 팬을 넘어 극성 팬인 것이다.
가로와 세로의 굵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있는 켈리 펜은 일정하지 않고 삐뚤어진 나의 글자모양이 나름의 규격화된 모양처럼 보이게 한다. 거기에 단단한 스틸의 펜촉은 긴 세월을 달려왔음에도 견고함이 무뎌지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굵기를 유지하고 있다. 손에 쥔 라미 사파리와 조이 만년필의 홈이 손가락을 편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글자는 흐트러짐 없이 그 모양을 유지한다.
펜만큼 노트의 종이 질감도 중요하다. 노트 역시 여러 노트를 전전하다가 작년 아이코닉 컴팩트 모눈노트에 정착했다. 노트의 종이 질감이 켈리 촉의 필감을 부드럽게 받아 준다. 필압을 주지 않아도 종이는 펜의 잉크를 뭉치게 만들거나 퍼지지 않게 잘 담아낸다. 모눈종이에 맞춰 작게 적어나가는 글자로 필사에 사용되는 잉크의 양도 줄었다.
작가의 말처럼 한 자루의 연필, 한 권의 노트가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영혼의 결과 무늬에 꼭 맞아 어떤 결핍을 채워주고 마음의 가시를 빼내어 준다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을 수있다.
새벽마다 펜을 잡고 마음 결에 와 닿은 책의 문장을 필사하는 시간으로 소진되고 상실된 기억의 순간과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을 채운다. 캠핑장에서 불멍을 하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숫가에 앉아 물멍하는 것으로 잊혀져 가는 시간의 나를 찾는 것처럼 필사의 시간은 책을 읽으며 흘러가는 느낌과 감정, 놓쳤던 생각을 붙잡아 준다.
쓴다고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느낌을 끌어오고 생각을 붙잡아 두는데 필요한 도구가 나에게는 만년필이다. 아이코닉 컴팩트 모눈노트에 그 순간을 잡아 놓는 것이다. 골똘하게 생각하게 만든 문장과 큰따옴표나 작은따옴표 속의 대가들의 문장을 베껴 적으면서 밀려드는 느낌과 감정을 생각으로 잡아 둔 문장이 노트에 남아 있는 것이다.
문득 지난 그 시간이 보고 싶을 때 꺼내보면서 그때의 느낌을 찾아보기도 한다. 혼돈의 시간을 버티고 폭풍의 바람을 견디면서 끌어올렸던 자존감을 다시 찾기도 하고, 별일이 없이 무난하고 평범했던 하루와 반가운 소식에 기쁨에 들떴던 그 시간의 만족감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노트에 정갈하게 쓰여진 글자를 보며 만년필의 촉이 가져다준 즐거움과 뿌듯함을 찬찬히 본다. 켈리 촉으로 적어 놓은 것이 매혹적인 선물이 된다.
글을 적다보니 작가의 연필에 대한 추앙만큼 나의 캘리 촉에 대한 애정도 환자 수준이구나 싶다. 좋다고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리고 소개해 구매케하고 선물했다. 나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나만큼 애정하는지는 모르지만 나처럼 애정하지 않아도 괜찮고 어디에 뒀는지도 모른체 방치되어 있어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펜 촉이 부식되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또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아닐테니.
그저 나에게 캘리 1.1촉으로 내 글자체가 만들어 졌고 나만의 필사의 속도가 생긴것으로 족하다. 작가가 연필의 팬이 되고 내가 만년필의 팬이 된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어떤 것을 찾기 위한 그 시간으로 나를 찾고 또 그것의 팬이 되는 것으로 지금의 이 시간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켈리 1.1촉이 장착된 라미 사파리 만년필과 조이 만년필의 팬으로 필사적 사랑법하고 있는 지금이 좋다.
한 자루의 연필, 한 권의 노트가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영혼의 결과 무늬에 꼭 맞아 어떤 결핍을 채워주고 마음의 가시를 잊게 해 준다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종이위의 산책자 p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