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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빈 May 09. 2023

올드우먼의 리딩과 라이팅

5 일상, 내 삶을 붙잡아 주는 풍경


벌써 5월이다. 인디언들에게 5월은  들꽃이 시드는 달이고, 기다리는 달이고, 플라워 문이 뜨는 달이다. 인디언들이 부족들마다 다르게 불리는 5월을 두고 내식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봄과 헤어져야 하는 달이다.


입동으로 찾아오는 차가운 북풍이 동지와 소한과 대한을 지나고 잠잠해지면,  봄의 첫 전령인 입춘이 찾아온다. 그렇게 봄이 찾아오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우수가 지나고, 경칩으로 삼라만상이 깨어나면  겨우내 굳어있던 몸도 기지개를 켠다. 굳었던 몸이 펴지고 이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인 춘분이 지나고, 가장 맑은 봄날인 청명과 봄비가 내리는 곡우를 보내고 나면 여름이 시작됨을 알리는 절기인 입하가 나타난다. 올해 입하의 절기인  5월 5일 어린이날에 여름을 알리는 신호처럼 장대 같은 비가 내렸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동이 트기 전 습관이 되어버린 음양탕을 마시며 어둠 속을 가로질러 내리는 빗소리를 음악소리 삼아 공도배 속 홍차가 제 맛을 내기를 기다렸다. 의식이 감성과 이성의 자리를  오가는 사이 사물이 분간되지 않은 시간이 느리게 움직였다. 기다린다. 어느새 주위가 밝아지고 장대비로 내리는 빗소리가 거친 소리를 내며 우수관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에 묻힌다. 책상 위 벽에 걸린 그림 속 백자의 고고함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청화’를 바라본다. 백자에 그려진 매화와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을 보면서 마시는 홍차의 향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향기롭다. 선물 받은 다만 프레르의 자르뎅 블루. 선물 준 이의 마음과 여행지의 운치가 담겨있어 더 달큼하다.


낯익은 풍경이 아닌 낯선 풍경이 보고 싶다. 한국적인 풍경이 아닌 이국의 풍경 속에 있고 싶다. 오래전 자매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생소한 거리를 걷기 위해 견뎌야 했던 무료한 비행시간과 그 비행기의 소음마저 그리워진다. 같이 걷던 그 길들이 눈에 밟힌다. 갈 수 있다는  믿음과  갈 것이라고 했던 약속을 잊지 않는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추억들 사이를 헤집어가며 수많은 사진으로 고정되어 있는 기억들을 살피며 언젠가 타국의 풍경에 취할 그날이 문 앞까지 와 있다고 상상해 본다. 설렘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기다림으로 즐겁다. 외국의 정취를 맘껏 누리기 위해 걷기와 근력운동으로 몸을 챙기고, 보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들을  초록창에서 찾으며 일정을 짜고, 여행가방에 넣어야 할 것을 메모하며 효율적인 여행가방을 싸는 시간. 낯선 곳을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준비하고 집중하는 시간은 지루함이 아닌 설렘이다.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가야 한다는 불편함과 내가 없는 집에서 생겨날 일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여행전이나 중에 발생한 여러 상황들에 대한 긴장감보다 여행으로 갖게 될 크고 작은 갈망의 순간으로 얻는 뭉클함으로 기다림은 희열의 시간이 된다. 거기에 보태져 우리가 갖는 감정들이나 관념들을 일상이 아닌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생각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주는 기대감으로 기다림의 시간은 유익한 시간으로 장면 전환된다.


일상적인 일 속에서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이백여 남짓의 시간이 주는 일탈로 경험하게 될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 무료하게 비치던 풍경들이 의미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기다림은  낯선 세계가 주는 선물이 된다.


문득 4월의 시집으로 읽었던 하덕규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속 ‘풍경’의 시구가 스쳐 지나간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 어제와는 다른 낯선 세계가 주는 풍경과 다르지 않음에도 익숙함에 묻혀 그 감흥이 희미해지고 변했음을 깨닫는다. 우리 집이라는  세계에서 흥미가 사라진 가구와 반려 물건들로 새로움이 없어진 공간에서 정해진 속도로 굴러가는 일상은 선물이 아닌 붙박이 된 세상이 되어버렸다. 골목길의 즐비하게 피어있는 봄꽃의 싱그러움과 상쾌함도 익숙함에 묻히고, 다채로웠던 색깔도 희미한 풍경으로 식상해진 것이다.


여행이 주는 기쁨 중의 하나가 기다림이라면 미지의 세계인 내일을 기다리는 오늘이 신나고  즐거워야 하는데 그저 그런 날로 지냈다. ‘삶은 여행’이라고 입으로만 말했다. 따분하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낯선 도시로의 여행만을 꿈꾸며, 새로운 풍경만을 상상했고 그 기다림만을 일상의 활력소로 삼았다. 나의 언행에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며 뉘우친다. 편안함이 주는 안락함을 잊고 특별한 세계의 위안이 담긴 풍광만을 찾고, 가사노동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세련된 세상이 세팅된 공상의 세계를 꿈꾸며 일상이라는 풍경을 놓쳤던 나를 반성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님의 ‘풍경’으로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돌아오는 풍경임에 눈을 뜬다. 눈에 익은 것이 아닌 눈에 띄는 것으로 성심성의껏 준비되어 있는 일상을 제대로 잘 챙겨 먹어야 가끔 잘 차려진 외식의 장소가 별식처럼 위안이 되고 치유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삶을 붙잡아주는 일상의 나의 풍경을 다시 본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풍경 풍     경  

-하덕규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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