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신학하기

by 백설

《 그림으로 신학하기 》

영어로 '성서'를 가리키는 '바이블'은 그리스어로 '비블리아'에서 온 것으로, 책들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를 높여서 '홀리 바이블'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거룩한 책들'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성서'. <마태와 천사2> 의 그림을 보면 예수의 제자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장면을 담았다. 이 그림에서 천사의 손가락을 보아하니, 1장 1절은 뭐라고 쓰고, 2절은 뭐고,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듯하다. 이 그림의 핵심은 성경은 '일점일획' 하나님이 친히 불러주신 '하늘의 언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천지창조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창세기가 성서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런 이유다. 우주는 우연히 발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것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묘사가 창세기 1장에만 아홉 차례나 반복된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고백하고, 다른 신들은 우상이라고 선언한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1장까지가 한 덩어리로 묶이고, 12-50장까지가 또 한 덩어리를 이룬다. 앞부분에는 익히 알려진 천지창조 이야기, 실낙원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1-11장이 넓게는 성경 전체, 좁게는 오경의 글머리를 이루고 있다. 창세기 12-50장에서는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유명하다. 아브라함은 '만인의 아버지', 사라는 '만인의 어머니'라는 뜻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 12:2) "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창13:2)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 (출 34:6)


'만인의 아버지'로 불리우면서 '믿음의 조상'이 되신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정도로 가진 것도 많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시니 성품도 매우 좋게 느껴졌다. 때로는 아브라함 같은 분이 내 남편이었으면 했던 적도 있다.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이러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구절은 나에게도 무척 은혜가 된다.


이 책의 약 반쯤 읽어가니 솔로몬을 낳으신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 여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전까지 군인으로,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던 다윗은 어느날 저녁,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던 그의 눈에 한 여자의 목욕 장면이 포착된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삼하 11:2)

"엘리암의 딸로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삼하 11:3)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데려와 "정을 통하였다" (삼하11:4)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던 다윗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우리 선조들의 율법을 잘 지킨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었다. 다윗에게는 저녁 늦게 쯤에 왕궁 지붕에 올라가 주위를 한번 살펴보는 그런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지붕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자기 집에서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여인은 빼어난 미모를 간직한 밧세바라는 여자였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다윗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불러다가 동침하였다.


다윗은 밧세바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러면 안되는데도' 동침을 하였는지 상상하게 된다.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경 외의 인물이 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 미술계에서나 집안에서나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목사이셨던 고흐님은 목사로도 화가로도 성공하지 못했다. 모델료가 궁했던 만큼, 빈센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자기를 승려나 농부로 표현했다.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오롯이 '화가-노동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림에 복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서 슬프다. 슬픔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내가 슬프다는 것, 네가 슬프다는 것, 함께 슬퍼할 줄 알기에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이걸 깨닫는 게 진리다. 고흐님의 삶은 슬픔 자체였으나, 그러기에 그의 그림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고흐님이 꿈꾸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고유 색상'이 노란색이었다. 노란색은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담아낸다. 그래서 고흐님의 '해바라기'는 단순한 꽃 그림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마누엘',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이렇게 빈센트 반 고흐님은 그림을 복음으로 여겼다고 한다.


죽음은 우리의 일상에 널려 있다. 죽음 앞에서 예외인 인간은 없다.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 쳐봤자 헛짓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죽음을 미리 끌어당겨 지금 여기서 마주하는 것, 다시 말해 '메멘토 모리'를 새기는 삶이야말로 일인칭의 삶, 곧 다른 누구의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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