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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Sep 04. 2017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관계 맺기

<20세기의 우리들>

세상에는 다양한 선입견들이 존재한다. 소년이 잘 성장하기 위해 아빠가 필요할 거라는 선입견, 청소년은 불완전하니까 다 자란 어른이 이끌어줘야 한다는 선입견, 여성보다는 남성이 강하고 진취적일 거라는 선입견 등등. 관계를 맺을 때 이러한 선입견들로 타인을 재단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항상 선입견을 가지고 타인과 관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미 저질러버린 오늘의 내 행동을 돌이켜볼 수 있는, 그리고 내일의 내 행동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계기 말이다.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아니 적어도 판단하지 않으려는 관계를 상상해보자.

소년에게 아빠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보다도, 두 여성과 함께면 충분하다고 얘기하는 엄마.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말하는 어른에게, 왜 당신은 담배를 피우냐고 반문하며 당당하게 담배를 요구하는 소녀. 생리라는 표현을 꺼려하는 분위기를 보고, 더 당당하고 담담하게 생리를 말해야 한다고 남성들을 가르치는 여성.

<우리의 20세기>는 이런 관계를 다루는 영화다.





이 영화는 마이크 밀스 감독의 반 자전적인 영화이다. 모계 가정에서 생활하는 소년 제이미가 세 명의 여성과 관계 맺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세 여성은 엄마 도로시아, 절친한 친구 줄리, 누이 같은 하숙인 애비이다.


시놉시스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도로시아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과 하숙인들과 생활하는 중년 여성이다. 어느 날, 아들 제이미가 시체놀이를 하다가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가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자기 자신만으로 제이미가 좋은 남자로 성장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느낀다. 그래서 하숙인 애비와 제이미의 친구 줄리에게 제이미를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마치 소년 제이미를 성장시키기 위한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 같지만, 영화는 제이미의 '양육'이라는 관점을 과감하게 버리고 제이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누구도 상대방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서로를 통해 배우게 된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전형적인 무언가를 상징하지도 않고 소모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고유한 제이미, 도로시아, 애비, 줄리, 윌리엄이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딪히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성장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규정되고 정형화되지 않은 청소년과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주체적이고 각자의 고유한 생각, 환경,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6-70년대의 역동하는 미국 문화와 맞물리면서 숨 쉬게 된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소통에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면서도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에게 귀 기울이려 한다. 여러 갈등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며 성장한다. 그 모습은 극적이지 않다. 담담하게 물 흐르듯이 지나갈 뿐이다.

영화는 뚜렷한 목적, 혹은 짜임새 있고 정교한 서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6-70년대의 색채를 입은 관계들의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더 집중한다. 어쩌면 전형적인 영화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를 촬영할 때 전형적인 서사에 갇히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독립적인 수필 하나하나를 섞어서 각 캐릭터의 배경과 엮으려고 했다. 물론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그의 방식이 영화의 이야기와 잘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잘 들어맞지 않더라도 관객이 직감으로 들어 맞히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제이미의 엄마, 도로시아는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녀는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는 20세기의 여성이다.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었고, 남편과 이혼했다. 배우자가 없어서 외로워 보이지만, 다른 남성들과 길고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같다. 아들 제이미를 주체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한 명의 개인으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가 듣는 음악을 들어도 보고 춤도 춰보면서 그에게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도, 충동적으로 질서를 무시하기도 한다.

감독 스스로도 도로시아라는 캐릭터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신의 엄마를 의미하는 도로시아, 누이를 상징하는 애비를 규정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일 테다. 대신 그는 엄마에 대한 기억, 도로시라는 캐릭터 그 자체, 도로시를 연기한 아네트 배닝이라는 사람을 '도로시'라는 캐릭터에 섞었다고 한다.



캐릭터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면 배우들은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까? 흥미롭게도 감독은, 배우들이 감독의 말보다 자신이 캐릭터와 관계 맺는 과정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애비 역을 맡은 배우는 실제 감독의 누이와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배우들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대사를 읊는다. 변형된 대사가 기존의 각본을 수정하기도 했다. 그의 대본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영화를 찍는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영화에서처럼 그들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영화의 내용까지, 이 영화는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다. 기존의 사회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의 온전한 이야기가 스며들게 된다.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 또한 영화의 인물들을 판단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관객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그들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체계적이거나 정돈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등해진다.


영화가 얼마나 잘 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영화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영화를 보고 느낀 우리들의 마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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