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마법의 양탄자

by 엘리

고소하고 우아하며 어딘가 따뜻한 향기가 가득 퍼진 차 안의 공기가 평소와 너무도 달라 문득 낯섦을 느낀 아침 길이었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차를 몰고 열심히 달려 아이와 함께 등교와 출근을 하건만 오늘따라 묘한 기분이 들어 왜 그럴까 생각에 잠겼다.


아! 향기!, 아니 냄새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


같은 냄새라도 어떨 땐 향기가 되고 어떨 땐 아찔한 악취가 되는 기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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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등학생인 아이가 시험 기간이라 몽롱한 정신을 차려보려고 딴엔 커피를 한 번 마셔봤나보다. 처음엔 ‘왜 이런걸 마셔요?’ 하는 눈치였는데, 주변 친구들 따라 가끔 마시더니 카페인의 효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심리적인 각성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오늘은 처음으로 텀블러에 물 대신 커피를 내려달라고 했다.


더운 여름 아침인데다가 잠까지 깨려면 얼음 동동 들어간 아이스커피가 좋을까 싶어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 담고, 덕분에 나에게도 커피 한 잔을 선물했다. 뜻하지 않은 나에게의 선물이랄까. 항상 정신없이 바쁘고 출발 시간에 늦을까 종종거리던 출근 준비 시간이 커피를 내리는 그 행위 하나만으로 순간 여유로운 어느 주말 아침이 된 듯 공간 이동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랴부랴 아이를 소 몰 듯 재촉하여 엘리베이터를 잡고 주차장으로 바쁘게 걸어가서 항상 꽉 막혀 신호만 4번을 받아야 하는 교차로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까지 나에겐 그 길이 매일의 길과 같았다.


그러다 문득 커피의 향기가 났다. 아이의 책가방 옆, 텀블러에서. 나의 도시락 가방에서.


평범한 일상이 고급스러운 음악이 흐르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것 같고,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유럽의 평화로운 어느 야외 카페 테라스에 앉은 기분이 이러지 않을까 상상도 해 본다. 우연히 들어간 에스프레소 바에서 기대 이상이었던 커피 맛에 놀라며 커피를 맛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던 남편과 나의 과거도 생각났다.


그리고 묘하게 어린 시절의 시골집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이 되면 시골에 있는 먼 친척 집에 방문해서 명절을 보내고 올라왔었다. 아버지가 형제가 없어서인지 북적북적한 분위기의 명절이 그리워서인지 지금 생각하면 아주 먼 친척 집인데도 항상 빠짐없이 내려가서 명절을 보내고 왔었다.


비포장 도로를 하염없이 버스를 타고 내려가며 멀미에 고생을 했던 악몽이 있고,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시골 밤의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던 과거의 시골집 방문이었지만 묘하게도 가슴 한켠 콕 찌르는 낭만과 정겨움이 느껴지던 그 시절 어린 ‘나’가 생생히 살아났다.


새벽에 부뚜막에서 올라오는 지푸라기 타는 냄새, 곧이어 맛있는 밥이 뭉근하게 가마솥에서 퍼지던 냄새,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국 냄새, 부엌에서 들리던 엄마와 할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새소리와 이따금 크게 울어대는 수탉 소리.


도시의 아이에겐 시골 새벽의 소리와 냄새가 낯설어서 묘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지금도 도시를 막 벗어나 교외에 나가면 가끔 뭔가를 태우는 냄새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럼 신기하게도 몇 십 년을 훌쩍 뛰어넘어 6살 어린아이로 돌아가 지금은 없어진 그 시간 그 시골집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북적북적하고 시끌벅적하고 따뜻함이 넘쳤던 인정이란 것이 이런 것이로군 하는 생각이 드는 시골의 그 아침으로.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대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곬족> 중에서 - 백석, 사슴(시집),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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