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만 볼 수는 없잖아
“라면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이 대사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유행어가 되었다. 사랑의 문을 여는 당돌한 말.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유지태의 대사가 가슴팍에 꽂혔을 것이다. 영화는 늘 사랑의 시작보단 ‘끝’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연인들의 흔한 데이트 코스가 영화관인 만큼 그들을 위한 예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많다. 특히 연말엔 더. 그리고 연애가 아름답지만은 않기에 사랑의 이면을 파헤치는 (난도질하는) 좋은 영화도 있다. 둘이 라면 나눠 먹었지만 결국 헤어지는 영화 <봄날은 간다>처럼.
재작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커플이 보면 안 좋은 영화’로 불렸다. 한 사내커플이 이별 후 치고받고 싸우며 온갖 찌질한 행동을 한다. 다시 만나 잘 해보려고 애써도 넘을 수 없는 둘 사이의 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영화의 가장 슬픈 장면이다.
관객이 너무 좌절할까 봐 걱정했는지 영화 마지막에 둘이 우연히 만나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
나는 커플이 보면 좋을 것 하나 없는 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연애 초기, 눈만 마주쳐도 설렐 때 꼭.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괜히 ‘나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버릇과 비슷했다. 사실 거기엔 ‘나중에 내 못난 모습이 보여도 여전히 날 사랑해달라’는 간절한 요구가 담겨 있었다.
변해갈 감정들에 실망하는 순수한 사람이 무섭기도 했다. 연애란 마냥 행복한 건 아니란 걸, 무엇보다 노력이 필요한 거란 걸 아는 사람이어야 마음이 놓였다. <연애의 온도>에 공감하는 사람이 좋았다.
영화는 영원히 행복해지고 싶어 서로 노력하지만 엇갈리는 남녀를 보여준다. 어떻게 사랑해나가야 할지, 방법을 몰라 헤매는 그들. 슬프고 답답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한껏 몰려온다. 예쁜 장면만 보고 웃고 싶다면 우연히 만나 필연적으로 이뤄지는 (그다음은 얘기하지 않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는 편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의 온도>는 정말 사랑하는 이에게 보여줄 만한 영화다. 그리고 이별 후 다시 사랑을 기다리는 이에게도. 과거를 돌아본 후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사람에게, ‘너만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니라’고, ‘사랑은 원래 함께 헤매는 거라’고 말이다.
7년이나 만난 남자 친구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널 만나면서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널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잔인한 말까지 들었다면? 당연히 함께일 거라 믿었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떨어진 이별은 너무 가혹하다.
나라면 미치고 돌아 밥 대신 고양이 사료를 먹을지도 모른다. <사과>의 주인공 현정(문소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별 통보를 받고 그의 집 앞에 찾아가 날 사랑하냐고 묻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가족에게 화풀이를 한다.
상처받는 여자가 가장 쉽게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얼른 사랑을 받는 것. 현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남자를 받아들이고,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예전의 그만큼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전부인 것 같은 사람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 받음에 도피했던 그녀는 권태에 빠진다. 결혼 생활은 달랐다. 언제까지나 날 사랑해주고 날 위할 거라 믿었던 남편은 당연하게도 심드렁해진다. 그러던 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시간이 흘러 만삭의 몸으로 전 남자 친구와 재회하는 현정.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떠난 남자가 갑자기 “널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라고 그녀를 흔든다.
영화는 불륜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멀찍이서 세심히 관찰만 한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현정이 남 같지 않았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때문에 삶이 뒤틀리고 흔들린다.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기엔 너무 약한 사람들이었다.
현정과 현정을 둘러싼 두 남자 모두 잘못한 게 없다. 그들은 늘 주어진 보기 안에서 선택했다. 미숙한 점이 있다면, 서로 솔직함을 주고받는 것을 겁냈고 미뤘다는 것뿐. 그러면서도 끌림에는 충실했다. 내가 그들이라면 달랐을까?
사랑은 위대한 신, 우주 같은 고귀함이 아니라, 그저 생활일 뿐이다. 그러한 감정을 겪는 우리도 위태롭고 유약해서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언제든 망가질 수 있다. 사랑에 휘둘리는 건 늘 당연한 사건이니까.
별다른 일 없이 느긋하고 여유롭게 흘러가는 일상. 익숙함은 가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잘 먹고 잘 사는데, ‘특별함’ 하나가 없어서 내가 너무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여행을 떠나곤 한다.
<우리도 사랑일까>는 여행 같은 영화다. 자세히 비유하자면, 여행지가 정말 좋아서 천국이란 생각에 눌러앉았는데, 결국 그곳도 익숙해져서 실망하고 절망하는 그런 영화. 익숙함의 가치는, 익숙함을 벗어나야만 온전히 와 닿기에 우리는 늘 후회한다.
영화 속 주인공 마고(미셸 윌리엄스)는 다정한 남편 루(세스 로건)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것뿐. 그러던 어느 날, 불꽃이 이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국 남편을 떠난다.
불꽃을 찾아 떠났으니 행복했으면 좋으련만, 마고는 새로운 연인과도 익숙해져 버린다. 그리고 과거를 더듬기 시작한다.
돌이켜 보니 마고는 그때 충분히 특별하게 사랑받고 있었다. 루는 그녀가 샤워할 때마다 몰래 위에서 찬물을 부어 왔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내가 그랬노라 고백하면 특별한 이벤트가 될 거란 생각에 그는 매일 아침 찬물을 준비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것이 시간과 만나면 더없이 특별해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걸까. 마고는 확실히 몰랐었다.
우리는 종종 사랑에 빠진 후, ‘이번에는 진짜야, 결혼할 것 같아. 너무 잘 맞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번복한다. 거기엔 확신보단 소망이 담겨 있다. 이번에는 진짜 특별하길, 말하는 대로 되길. 사랑은 자기 최면이라는 못난 걸 달고 다닌다.
나의 과거와 1% 다른 특별함은 있을지 몰라도, 100% 다른 특별함은 찾아오기 어렵다. 우리는 결국 사람이고, 시간이라는 놈도 버티고 있으니까. 특별함이라는 환상을 지워나가는 일,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