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기저귀를 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변기에 앉는 모습이 꽤나 익숙하지만, 어제는 너무 급했던지 팬티에 대변을 보았고 오늘은 좋아하는 영상을 넋 놓고 바라보다 팬티를 입은 채 소변을 봤다.
나는 비위가 꽤 좋은 편이라 대변이나 소변이 묻은 팬티를 그리 어렵지 않게 손빨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매일 오줌과 똥이 묻은 팬티를 손빨래하다 보니 괜히 짜증이 났다. 아이 똥은 더럽지 않다던데. 더럽다...
아이의 팬티를 빨다가 생각했다.
'내가 더 신경 안 써준걸,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늘 이런 식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3년 동안 예상치 못했던 아이의 행동으로 어쩔 줄 몰랐던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미리 대처할 수 없었던 일이나 유난히 모든 일이 다 힘들게만 느껴졌던 날. 먼저 아이 탓을 하다가 곧바로 내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졌다.
살면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누가 잘못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경우보다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모호할 때가 더 많다. 알고 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닐 때도 있고.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누구든 탓하고 싶어 지기도 한다.
사회에서는 내 탓을 하는 게 힘들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어떻게든 나를 감싸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 속 어딘가에는 있을 내 자리를 찾아 열심히 살아보자고 했던 다짐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서. 누군가의 탓을 한다는 건 나에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이랬던 나에게 나보다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처음 해보는 엄마라는 일에 좌충우돌, 크고 작은 일들이 매일 벌어졌다. 특히나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는 일이 생길 때면 늘 내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누구라도 탓하고 싶어 졌지만 결국 내 탓이었고 내가 더 잘해야겠다 다짐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지. 내가 더 잘해야지. 다른 건 못 되더라도 너에게만은 꼭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