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시댁과 친정에서 각각 1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내일 뭐 할 거야? 나 명절에 고생했으니까 내일은 나의 날 하면 안 돼? 나 오랜만에 대청소하고 싶어"
우리 집에서 나의 날은, 그날 같이 할 일이나 식사 메뉴를 고를 수 있고 집안일을 상대에게 부탁할 수 있는 특권의 날이다.
"너 이럴 때마다 진짜 싫어"
그는 찬 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대답했다. 좋았던 표정이 180도 변했다. 아마 이전과 같은 맥락의 분개인 듯하다. 본인이 기다렸던 딱 하루 남은 연휴, 그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여 사용할지 이미 머릿속에 있는데 내가 감히 침범한 것이다.
"나는 명절에 고생 안 했어? 왜 너의 날로 정해? 나는 내일 수영장도 가고 바이올린 교습실 가려고 했어. 너는 내가 내일 뭐 하고 싶은지 궁금하지도 않아? 왜 나 뭐 할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네가 정해버려?"
"아니.. 네가 청소가 싫다면 안 해도 돼, 그냥 제안해 본 거야"
쏘아붙이는 눈빛이 분노로 활활 일렁거릴 정도로 남편의 기분은 이미 상해버렸고 나는 아차 싶었다. 요즘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본인이 직접 계획하고 통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나는 별일이 아니어서 쉽게 쉽게 말하는 게 그에게는 별일일 수 있으니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부사이에 일거수일투족 사사건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왜 나여야 하는지, 도대체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지 아득하고 서럽기도 했다.
그날, 그는 함께 자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옆방에서 새벽 2-3시까지 바닥에 누워있음으로 나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했다. 다음 날 오후 3시 30분이 돼서야 배달시킨 피자가 도착했다는 내 말에 슬그머니 일어났다.
따끈따끈한 피자와 맥주를 마시며 그의 기분이 약간 좋아진 틈을 타서 나는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자기가 도대체 요즘 왜 그러는지 물어볼 때마다 모른다고 일관하니까 마음이 참 힘들어"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다시금 벌컥 화를 내는 남편에게 나도 울화가 치밀어 맞받아쳤다.
"모른다고??? 그래 그럼 너 병원 가, 아님 상담이라도 받던지. "
"나는 전문 상담가를 안 믿어, 병원도 그렇고. "
"자기야, 너의 배우자인 내가 고통받잖아. 내가 힘들다고 하잖아. 그런데도 필요 없어?"
"난 그냥 너랑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다른 사람들한테 속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벽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나랑 대화하는 게 충분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편은 거부의사를 명확하게 밝혔고 정말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1. 환자처럼 대하지 않기
2. 조언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기
3. 칭찬 자주 해주기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면 자신은 괜찮아질 것 같다고 했다.
"알겠어, 내가 노력해 볼게.... 대신 내가 노력하고 있는데 다음에 자기가 이렇게 벌컥 화를 내면서 길길이 날뛰는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또 제안할 거니까, 그때는 정말 진지하게 재고해 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거"
"약속할게"
남편은 자기가 화를 내는 바람에 소중한 연휴의 마지막 날이 날아갔다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은 똑같은데 자꾸 이렇게 엇나가는 우리가 안타까워서 나도 마음속으로 결심한 것이 있다.
먼저 제안하지 않기 - 남편이 부담스러워하는 산책, 식사 메뉴, 데이트 장소 등등
남편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를 넓혀서 안심할 수 있게 해 준다.
일단은 남편이 안정을 찾고 회복이 될 때까지 나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하면서 인내해 보기로 했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말이 있다, 나는 오래 기다렸다가 마침내 따먹는 다디단 과육의 맛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