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군 Oct 09. 2017

셋째날_ 나가사키 원자폭탄의 흔적을 찾아 떠나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그리고 평화공원

누군가에게는 비극, 누군가에게는 희극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히로시마 리틀보이 원자폭탄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 팻맨 원자폭탄 


  미국은 단 두발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인류 최초로 폭발하게 된 원자폭탄, 인류 최악의 무기라고도 할 수 있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일본에게는 비극이지만, 우리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자폭탄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서 8월 15일 광복을 맞이 하게 되었다. 결과가 어찌 되었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서 많은 민간인들은 피해를 받아야 되었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돈이 들게 되었다. 국제정치 그리고 동북아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직접 보고 느끼고자 올해 2월 히로시마를 방문하게 되었고, 이번 8월에는 나가사키를 방문을 함으로써 원자폭탄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인지 깨닫고 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최근에 북한은 ICBM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거나,  수소폭탄 개발이 완료되었다고 발표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군사적인 도발을 진행하고 있다. 결국엔 이러한 무기들은 적을 무찌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그 칼날 끝이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무튼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들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 문제가 되는 곳들을 방문하면서 직접 겪어보고 공부를 하면서 나 자신만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번 나가사키 여행도 그 일환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전차를 타는 게 교통적으로 편리하다. 나가사키역에 관광안내센터에 방문을 해서 전차 일일 승차권을 구매하였다. 한 4~5번 정도 타면 본적을 뽑는 듯 하나. 나는 딱 본적을 뽑는 수준으로 탔다.... 시간이 많았다면 많이 탔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이튿날 역시 날씨가 아주 맑았다. 밖의 경치는 좋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실내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이 있는 역에 내려서 조금씩 걸어갔다.



  이번 여행의 제일 베스트 프렌드인 손선풍기는 오늘도 열일을 하면서 나의 더위를 조금이나마 빼앗아 주었다.

국립 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추도 평화기원관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미처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원폭자료관 연결 게이트가 보였다. 이때는 하늘에 구름이 많이 보였지만 그렇게 선선한 날씨는 아니었다. 관람 발매장이라고 적혀있는 것 같았는데 지하 2층에 관람권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고 적혀있었다. 원폭자료관 수장 자료전 등이 실시되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이렇게 원형?으로 되어있었는데 걸을수록 옆에 연도가 적혀있었다. 마치 과거 1945년 나가사키 원폭이 투하되었던 시점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건축물을 설계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매한 입장권 그리고 안내 책자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이곳의 시간은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시점에서 멈추어 있었다.

입구에 적혀있는 나가사키가 최후의 피폭지가 되기를 이라는 문구가 인상이 깊었다. 지난번 히로시마 여행을 갔을 때 만났던 일본인 할머니는 계속 전쟁이 싫어요 라고 했었다. 그만큼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자신들의 가족들을 잃었고, 이웃주민들이 한순간에 죽어나갔다. 이러한 피해 상황들을 보았을 때 역시 전쟁은 없어야 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피폭 전의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처럼 상당히 발전이 된 도시였다. 그러한 도시가 한순간에 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원자폭탄으로 인해서 변한 나가사키의 거리 모습은 어떠할까?



  철근이 휘어있고 건축물들은 파괴되어있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나가사키 모습은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 목조로 지어진 건물들은 형체도 남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그나마 이 정도 되는 건물들이 그 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위의 내용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인구는 약 24만 명이었고, 그중 사망은 7만 3천여 명 부상자는 7만 4천여 명으로 약 1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것도 단 한 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서.

그런데 이런 원자폭탄이 전 세계에 수백 개, 수천 개는 더 존재한다고 하니 그 위험은 말로 할 수가 없다.

이런 핵무기를 북한은 끊인 없이 개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여야 할지에 대해서도

수많은 고민을 만들어냈다.


원폭 피폭을 받은 사람들의 피부가 변형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옷들도 있고 죽어있는 사람들의 사진들도 전시가 되어있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체 처음 보는 무기로 인해서 목숨을 잃어갔다.


  이 것이 바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모델이다. 그 옆에 지속적으로 이 폭탄에 대한 영상들이 나오고 있으며, 폭탄의 생긴 것을 보고 팻맨이라고 부른다. 원자폭탄은 우라늄과 플루토늄 두 가지 폭탄이 있는데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이 플루토늄이고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가 우라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옆에는 이렇게 원자폭탄의 내용물에 대한 단면도도 표시가 되어있었다.



  위의 설명내용을 보면 가운데에는 중성자원이 있고, 그 뒤에는 핵분열물질(플루토늄 239), 템퍼라고 불리는(이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밖에 고성능 폭약이랑 이를 터뜨리는 기폭장치로 구성이 되어있다.

과거에 전공수업 시간에 배웠던 원자력발전소의 원리를 보면(우라늄을 기준으로 배웠다...)

보통 천연 우라늄에는 핵분열이 가능한 우라늄이 1%도 포함이 되어있지 않은데, 원심분리기에 놓고 돌리면 2~5%의 농축우라늄을 만들 수 있고 이로 인한 핵연료를 사용하지만, 흔히 알고 있는 우라늄 폭탄은 농축 정도가 90% 정도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통해서 2015년도 6월 정식적으로 협정문에 서명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농축우라늄 %를 협상을 통해서 늘려서 20% 미만 정도는 연구용으로 쓸 수 있도록 개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무기용으로는 구매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구 때문에 핵잠수함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핵잠수함을 무기로 볼 것인지, 이동 수단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추진 여부가 나온다고 하는데, 언론들을 보면 개발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무튼 원자력 발전소는 농축우라늄 안에 있는 중성자를 때리게 되면, 핵이 쪼개지면서 2~3개 중성자가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러한 중성자가 연쇄적으로 쪼개지고 열이 나고 쪼개지고 열이 나는 반응에 의해서 물을 끓여서 증기를 발생시키고 그 고압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돌리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팻맨 이후에도 다양한 원자폭탄 피해로 인한 사례들이나 자료들이 있었다. 다음 편에 소개를 하겠지만, 일본은 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관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둘째 날_ 세계 3대 야경 나가사키 야경을 눈에 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