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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벽소령

by yabanhama

국토정보지리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4천 개가 넘는 산이 있다고 한다. 비록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유명한 산은 없지만 우리 주변에는 늘 산이 있다. 높다고 해도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의지와 시간만 있다면 오를 수 있는 산들이다. 친구 같은 산이라고 할만하다. 내가 언제나 친구로 생각하는 산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천왕봉을 주봉으로 삼도에 걸쳐있다. 지리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삼도봉의 유래이기도 하다. 주능선이라 할 수 있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km에 이르다 보니 등산객이 하룻밤을 머무를 수 있는 대피소가 7군데나 된다.


20대에는 구례 화엄사에서 시작해서 노고단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능선을 타고 싶은 만큼 탈 수 있었다. 30대가 되면서 장거리 산행은 여건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백무동으로 천왕봉까지 다녀오거나 노고단을 지나 반야봉을 다녀오면서 지리산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어느덧 60대. 벽소령 등산로가 자연스러운 선택지가 되었다.


지리산 인근 남원에서 접근하여 음정마을부터 벽소령 대피소까지 이어지는 등산로이다. 음정마을부터 등산로 시작점까지 가파른 길을 차로 이동할 수 있어서 실제로 걸어가는 등산로 경사는 완만하다. 5킬로 남짓, 평탄한 산책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벽소령 대피소에 이르기 직전에 돌계단을 300미터 정도 올라가야 한다. 평탄한 길이 갑자기 이끼 잔뜩 머금은 돌계단으로 바뀌고 주변은 삽시간에 울창한 수목으로 둘러싸인다. 3시간 이상을 가파르게 올라가는 백무동 등산로 축소판이다. 무릎에 자신이 없는 등산객은 버거운 계단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릎에 자그마한 자신감이 남아 있다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300미터 돌계단 길은 오를만하다. 지리산 능선에 올라서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리산 능선에 올라서면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을 받는다. 자유라고 하기에는 지리산의 존재감을 담아내기 어렵다. 가장 가까운 느낌은 몰입에서 오는 일체감 정도가 아닐까. 흔히들 행복감은 사후적이라고 하는데 지리산 능선에 올라섰을 때 느끼는 감정 역시 사후적이다. 문득 쉼브라스카의 시구가 떠오른다.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평생 친구인 지리산을 만난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지리산 능선에 올라서는 행운을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예전에 지리산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 가운데 갖가지 이유로 동행이 어려워진 경우도 적지 않다. 60살이 넘어서도 벽소령 등산로를 따라 지리산 능선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지리산은 자주 보기는 어려운 친구다. 그러나 늘 거기에 있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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