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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Oct 25. 2020

최초의 배신

대가는 혹독했고, 나는 유치원을 퇴학당했다!

01.  최초의 배신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배신, 그 배신의 주체는 친구였다.


딸이 귀한 집의 여섯 살 터울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손만 닿으면 우는 아이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는 꿈속에서 '복숭아 세 개를 따서 치마폭에 싸서 물길을 건너다가 하나를 떨어트렸다.'

강물에 휩쓸리는 복숭아를 하염없이 보고 서서 울었다는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해 성별도 알 수 없던 나의 형제는 흔적도 없이 엄마 뱃속에서 사라졌다. (선택인지 누락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나는 딸이 귀한 집 막내로 자라면서, 사람의 손만 닿으면 울었다. (물론 오빠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건 내 거! 오빠 것도 내 거! 엄마, 아빠는 당연히 내 거! 뭐든 다 내 거!


집에서는 폭군이었지만 밖에만 나가면 다른 아이가 되었다. 특히 또래 집단에서는 한없이 순해졌다.


오빠가 먹던 영양제 젤리를 병째 빼앗던 나인데, 밖에서는 과자 봉지를 통째로 친구에게 주고 하나씩 얻어먹었다. 말 그대로 나는 우리 집에서 배신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배신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그 대가로 일곱 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우리 집 뒤에는 사립유치원이 하나 있었다.

지역에서 하나뿐인 수영장이 딸린 유치원이었기에, 여름이면 각지에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내가 그 유치원의 원생임에 자긍심을 느끼며, 타 지역에서 온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텃세를 부렸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유치원의 수영장만큼 유명한 것은 산비둘기와 드넓은 모래밭이었다.


모래사장을 연상케 하는 모래사장은 유치원 전교생이 한꺼번에 나와서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유치원이 끝나고 나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모래놀이를 하곤 했고, 가끔 고개를 들면 붉은 벽돌 건물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수 십마리의 비둘기 떼를 보면서 

그것들이 달려드는 상상에 몸서리치곤 했다.


내가 추억하는 어린 시절의 근사한 기억의 대부분은 유치원을 배경으로 하지만, 나는 그 공간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테스와 보낸 여름]


02. 앞집 할아버지는 목수였다. 



그 시절 벌서는 것처럼 팔을 높게 들고 검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종종 술에 만취해 있었다.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내 손에 지폐를 쥐어주곤 했다.


어른들은 할아버지의 성정이 괴팍하다고 입을 모았지만, 나나 오빠한테 할아버지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를 불편해하면서도 그를 끊임없이 찾았던 것을 회상하자니, 성정이 괴팍하지만 솜씨는 좋았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고약한 버릇 중에 하나는 동물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말도 섞지 않고 신고했을 텐데...)


할아버지 옥상에서 나와 놀던 오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내가 키우던 병아리도 부리가 나고 배냇 털이 빠질 때 즈음, 할아버지 옥상으로 날아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결정적인 이유 또한 그 버릇과 무관하지 않다.

동네 아저씨가 귀하게 키운 개가 집을 나가서 동네가 뒤집힌 적이 있었다. 나도 그 개를 강아지 시절부터 봤기에, 오빠 손을 잡고 유치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개는 놀랍게도 할아버지 옥상에서 발견되었다.

개는 무사 귀가했지만,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모래밭에서 할아버지와 몇 번 모래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어김없이 할아버지와 모래성을 쌓고 놀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간 뒤, 모래밭 근처에 맥없이 쓰러져 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할아버지는 유치원에서 비둘기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시장 갈 때 쓰던 바퀴 달린 가방을 가지고 유치원으로 되돌아 갔다. 죽은 비둘기는 무거웠고, 몸통을 잡으면 맥없이 양쪽 날개 죽기가 펴졌다.


처음에는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참으며, 그것들을 가방에 실었다. 그런데 다섯 마리쯤부터는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근처에 있던 삽으로 모래밭을 파서 그것들을 묻었다.


한 구덩이에 세 마리 이상씩 넣지 말기, 그래야 나중에 날아가다 서로 다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해가 떴을 때 시작한 비둘기 묻기는 날이 저물어서야 끝이 났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평소보다 늦게 해가 졌다는 사실을 되돌려 보면, 아마도 늦 봄과 초여름 사이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03. 최초의 비밀이 생겼다.


나는 그걸 비밀로 했다. 엄마한테 말하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 게 뻔했고, 오빠한테 말하면  엄마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최초의 혼자만의 비밀이 생긴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씻고 일어나서 유치원에 갔다.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모래밭 네 귀퉁이를 빙 돌면서 그 안에 있을 비둘기를 추모했다.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고 낮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원장 선생님이 찾아왔다.


"오늘은 낮잠을 조금 있다가 자고 모래성 놀이를 할 거예요"

'제발, 이건 꿈이에요! 나는 낮잠이 필요해요!!'


나는 제발, 그 상황이 꿈이길 바랬다.

혹은 갑자기 비가 오거나, 아이들이 노는 것보다 잠을 택하길 바랬다. 그건 현실이었고 아이들이 낮잠을 선택할 리는 없었다.


나는 잠을 자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선생님 손에 이끌려 모래밭으로 갔다.




아이들이 삽을 뜰 때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때 당시 가장 사랑했던 친구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둘기들이 불쌍해서 내가 묻어주었다고, 너만 알고 있으라고,


아이들은 눈물을 닦으면서 교실로 돌아갔고, 훌쩍이면서 강제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나는 잠에서 깨기도 전에 원장실로 불려 갔다. 나는 그곳에 와 있던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이른 귀가를 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고, 이후 몇 번의 여름이 와도 유치원 수영장에 가지 못했다.


엄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 유치원에 가지 않아도 좋다고, 매일매일 늦잠을 자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유치원에 가고 싶고, 모래밭이나 수영장에서 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에 조르거나 떼쓰지 않았다.


[테스와 보낸 여름]





이것은 내가 기억하는, 혹은 내가 당한 최초의 배신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것, 혹은 내가 저지른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 그것을 공유하자고 말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 기억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몇몇 일들을 겪고 최초의 배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함께 하자고 했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일방적인 바람이었을 뿐, 합의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집안에서 폭군이었던 나는 주로 배신을 하는 처지였기에 내가 당한 최초의 배신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배신의 대가는 혹독했다.



여섯 살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잃었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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