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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Oct 12. 2020

'나란히'는 누구에게 허락된 부사일까

오래전 가을과 겨울, 실패에 관한 기록  


나는 어쩌면 전생에 뜀박질 선수가 아니었을까,  시작하는 일기를 찾았다.


몇 해 전 이 계절, 도망치는데 이골이 난 나한테 질리고 질려있던 상태였던 게 분명하다.


 계절의 각기 다른 대상에 대한 감정이 의식 흐름대로 나열돼 있는데, 이어진 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모습이 둘 다 낯설어서 기록해둔다.  




2017. 10. 11


나는 어쩌면 전생에 뜀박질 선수가 아니었을까,

평생 도망 다녀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가진 역적의 자식은 아니었을까.그렇지 않고서는 매사에  이렇게 도망갈 수는 없다.      


우린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어느 순간 그냥 상대와 보내는 시간이 귀찮기만 했고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내가 옮기는 시선 틈에 앉은 네가 걸리적거렸고, 내가 책을 보는 사이 걸어오는 너의 말이, 창밖 오토바이 소리나 공사 소리 같은 소음으로 느껴졌다.


한마디로 우리 관계가 사실은 아주 하찮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우리 관계가 자연스럽게 페이드 아웃되길 원했다.다음을 기약하지도 이별을 말하지도 않고 그냥 천천히 멀어질 생각이었다.



이 모든 건 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농담도 해본 적 있다.

이런 문자를 치기도 했다.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을까, 두려움이었을까.


-S, 총 쏴 본 적 있어?

-맞아본 적도 없지?

-나 너한테 총 쏴버릴까.


 

그 사람을 죽일까. 물어 죽일까.


 윗니와 아랫니가 닿도록 너를  물어서 세게 흔들어버릴까. 끈적한 피가 배어 나오면 놓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까.헤어지는 마당에 그깟 거짓말쯤은 대수도 아니지.  


이건 로맨틱도 아니고 호러도 아니다, 너무 구리고 구질구질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두는 김에 연락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고, 멀어질 관계니까. 그래, 가능한 감정에서 멀리 도망가기로 했다.     


                


2018. 12.19


해밀턴 호텔이  해밀턴 호텔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태원은 이태원이고 한남동은 한남동이니까.


내가  울면서  한남동 헐떡 고개를 오르고 있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해 겨울과 봄은 기쁜 날보다 슬픈 날이 훨씬  많았으니까, 너무 많이 울고 너무 많이 웃었으니까.당연히 그날도 눈물이 났겠지, 걷다 보니 언덕이었겠지.


나는 그냥  언덕이 너무 높고 친구의 집에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갑자기 누군가가 영어로 말을 거는 바람에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여기를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는 너무 골목이고, 초행길이라  찾겠어.’라고 말하는 외국인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외국인이 말한 위치를 지도에 찍고, 가는 길을 열심히 설명했다.

 

"이 근처야. 저 골목을 꺾으면 바로 목적지가 나올 거야."


상대는 골목으로 돌아오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너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야."

"아니 내 목적지는 네가 가는 걸 보는 거야."

"그래 고마워."


"내 길을 찾아주는 잠깐 동안 네가 울음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했고, 내 생각이 맞았어."라고 했다.

 


내 옆에는 유순한 갈색 눈의 외국인이 서있었고,

상대가 영어로 말을 걸어와서 나는  여기가 한남동이 아니라, 뉴욕이나 파리의 어느 뒷골목쯤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길을 잃은 동양인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문 하나,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감정을 길거리에 질질 흘리고 다녔을까.        




'나란히'는 누구에게 허락된 수사일까.

적어도 우리는, 나는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란히 앉거나, 나란히 밥을 먹거나, 나란히 걷는 것.

 나란한 삶을 지독하게 찾아 헤맸지만, 매번 실패하고 혼자 돌아왔다.


길 위에서, 언덕을 오르고 집에 돌아가면서 너무 멀다고 물리적 거리보다 심적으로 너무 멀고 험한 길이라고 여겼다.  


정말 어쩌면  이번 생의 목표가 영원히 실패하는  아닐까, 그리고 이런  누군가는 가혹한 운명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2020년 가을에 덧붙이는 일기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슬픔은 일시적인 실패였음을 이제는 안다.


어쩌면  시절의 나는,  계절의 나를 위해서 

과거의 '나쁜 운들'을 몰아 쓴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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