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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Dec 29. 2019

'비겁'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비겁'은 용기일까, 무례함의 다른 이름일까?


모호한 상태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용기일까, 배려가 없는 것일까.  

만약 상대가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기를 바랐다면, 그래서 종전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면 

과연 말을 꺼낸 주체를 솔직하다고 생각할까? 


이런 생각 끝에 비겁함과 무례함이 애초에 한 몸인, 샴 같은 사이가 아닐까

결국 비겁함은 배려를 덧씌운 자기 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누구 하나가 말을 꺼내면 끊어질 듯, 팽팽한 낚싯줄 같은 관계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무신경해서 유지될 수도 있고, 양쪽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지켜질 수도 있다.  


결국  양쪽이 입을 다물면 유지되는 관계라는 것은, 서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사실은 하나도 소용없고 부질없는 관계일 수도 있다.  

말 한마디로 끊어지고, 침묵만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보다 얇고 위험한 관계가 어디 있을까. 




아주 상식적이고 이상한 예시를 하나 생각해보기로 한다. 


두 사람이 있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좋은 관계이고, 대체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다. 

(동성일 수도, 이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두드러지는 갈등이 없지만, 이들은 사소하게 취향이 안 맞는다. 어른이기 때문에 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요하지 않으면 되는 문제기 때문이다. 그게 성향이건 취향이건 아무렴 관계없다.  

그런데 이들이 가까워지면서 문제들을 직면하게 된다. 


가령 누군가가 불쾌함을 드러내거나, 불편함을 드러낸다면 균열이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낚싯줄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무줄에 불과했다거나, 

시간이 지나자 삭아서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삭고 삭아서 툭 끊어져버린 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은 오래 걸리고, 많은 심적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겁의 사전적 의미는 '비열하고 겁이 많다'는 뜻을 지닌다. 

이때 사용되는 '비(卑)'는  낮을 비인데, 직역하면 '겁이 낮음' 즉 '겁이 적음'쯤이다. 

겁이 낮으면 용감하다거나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비겁은 겁과는 무관한 단어인 셈이다. 




나는 '당신은 정말 비겁하다'는 말을 뱉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상대가 악하고, 무례하고, 해로웠다는 판단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어느 정도 객관화가 되고 나니, 

'비겁하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훼손하거나 상처 내기 위한 무기로 내가 빼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낸 용기에 대한 응답이 왜 그런지, 왜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지,

나를 좀 봐달라고, 나한테 조금 더 마음을 열어 달라고 부탁한 것에 대한 상대의 거절을 

나는 '비겁함'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당시의 우리 관계가 서로 팽팽하게 붙들고 있는 낚싯줄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서로 잘 잡고 있고 유사한 간극과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겁이 많은 나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고, 상대 역시 나에게 그것을 잘 잡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문제 투성이었다.  

낚싯줄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은 고무줄에 불과했고, 

시간이 흐르자 저절로 삭고 삭아서 툭 끊어져버린 것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단 튕겨진 고무줄에 맞은 내 손이 아프니까, 서러우니까 

그 감정에 골몰하여 원인을 상대에서 찾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일부러 고무줄을 놓치거나, 끊어버린 것처럼 화를 냈다. 

그 주체가 사실은 네가 아니고, 우리일 수도 있고,

의도가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다. 



이 과정 끝에 나는 비겁함을 다시 정리하기로 한다. 

겁이 낮다는 것은 겁이 없다는 게 아니라,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 

두려움을 무릅쓰고, 너와 나의 관계를 직시하고 물어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더 '비겁'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수없이 도망가고 뒷걸음질 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네가 잡고 있는 감정이 나와 같은지, 

그리고 조금 더 내가 한발 앞으로 다가가도 될지 묻고 또 물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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