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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Nov 25. 2019

나를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왜 나를 혐오하는 데 온생을 다 써버렸을까. 

나를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라고 물으면 나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기억'이라는 인지 작용이 시작된 순간부터 (대략 6세쯤으로 추정) 나는 '뚱땡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저체중이었던 내 별명이 뚱땡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웃음이 나지만,      

어린 시절 나는 뚱뚱하지 않다고 엉엉 울었다. 


아이의 체형이 가는 팔다리에 비해 배가 볼록한 것은 당연지사인 것을 

오빠는 늘 내게 뚱땡이, 옥돌메,  못난이라고 불렀다.                

두꺼운 다리를 지적하면서, 교복 치마 말고 바지를 입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성 비하, 외모 지적하는 발언이 사랑과 애정으로 포장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정당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단호하게 말 못하고 울어버렸을까.) 




그런 이유로 성인이 된 이후에 타인한테 

"너 예뻐, 눈도 예쁘고 손도 예쁘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얼굴을 붉히고 그 자리를 떠나기 급급했다.       

이런 호의와 환대를 받다니, 무슨 의도지? 나한테 왜 그러지? 나를 놀리는 건가?     

라는 수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지난한 자기혐오의 역사가 너무 깊어서 

상대의 진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 한 마디면 될 것을 그 시절의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절대 못 뱉었다.         


                 



이후에도 누군가 웃는 모습이 예쁘다, 눈이 예쁘다,라고 말하면 손사례를 치거나      

너스레를 떨어서 얼른 화제를 넘기곤 했다.      

이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는 칭찬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했고      

타인을 칭찬하는 일 또한, 몇 번이나 마음먹고 시뮬레이션까지 돌려야 실현 가능한 어른으로 컸다.               


결과적으로 나는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는 내 뒷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한 사람을 만난, 스물일곱 여름에 처음으로 반바지를 입었다.      

그날 이후 치마를 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데 1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반바지를 입고 치마를 입게 된 동기가 '나'가 아닌, 타인에 기인했다는 게      

지금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 또한 나의 과거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대한민국에서 자란, 남자 형제가 있는 여자 아이의 경우

통상 이성에 눈을 뜨기 전까지 자신의 가치를 모르거나 

평가 절하하면서 성장하지 않을까. (차라리 나의 경우로 국한되었으면 좋겠다) 


이성에 눈을 뜬 이후에 알게 되는 자신의 가치 또한, 

상대가 원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불과할 뿐,      

내가 나의 강점을 확신하는 데는 대체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당 부분의 상대의 취향에 국한된 말일 확률이 매우 높다.  (밑줄...)              



지금 생각하면 나는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버렸는지,      

타인이 예쁘다고 하는 말에 일희일비했는지 

그 비극의 시작과 끝을 떠올리면 

과거의 내가 너무 가여워서 차마 어떤 위로조차 건넬 수 없다.         


                            

30살이 넘어서 좋은 건 무수히 많지만 그중 한 가지는      

일상이나 생활 전반에서 타인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됐다는 사실.      

자연스럽게 나를 챙길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어떤 상태에서 컨디션이 좋고,      

어떤 사람들과 있을 때 기분이 좋은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 때 힘을 뺄 수 있고, 즐거울 수 있는지     

무엇보다도 이제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결국은 나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 겸양금지, 겸손금지가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 

30살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웃는 모습이 예쁘고, 혼자 노는 근사한 방법을 30개쯤은 알고 있는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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