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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May 18. 2024

여행자 P에게

언니를 그리워하며


초록하면 생각나는 언니가 있다.

새싹을 닮은 그녀는 힘든 시기를 보내던 나에게 하나의 탈출구 같은 사람이었다.

ESTJ인 나와 ENFP인 언니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지만 또 아주 닮았었다. 걱정과 생각이 많은 점이 특히 닮았던 우리는 불안에 대해 얘기하며, '나만 이렇게 불안한 게 아니구나' 느끼며 서로를 위로했다.


언니는 마음을 먹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스프링같은 사람이었다. 배드민턴을 배울 때에도, 수영을 배울 때에도, 독서모임에 참석할 때에도 주저하는 적이 없었다. 늘 '완벽한 타이밍'을 핑계삼으며 밍기적거리던 내게 언니는 신기한 존재였다. 언니의 충동적(?)인 도전이 이끌어내는 긍정적인 결과들은, 내가 무엇을 시작할 때 큰 희망과 용기가 되었다. 내가 복학 직전, 다리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봉사단에 가입하게 된 것도 언니의 영향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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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언니를 안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언니는 같은 백혈병 환자였다. 투병에 대한 정보를 얻던 와중 언니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담백하면서도 알찬 언니의 블로그에 취향저격 당해버린 나는 매일같이 언니의 글을 보며 내게 닥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진정시키곤 했다. 언니의 블로그에 댓글을 달며 팬을 자처했다.

그러다 퇴원 후 병원에서 언니를 만나게 되었고, 나이가 비슷했던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 공식 외래메이트가 되었다. 우리의 주치의 선생님은 당시 진료지연이 어마무시하기로 유명했는데, 진료지연이 60분이던 때에도 언니와 함께 수다를 떨다보면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다.


항암 부작용으로 걸을 수 없던 내가 드디어 걸을 수 있게 되고 드디어 언니와 병원을 벗어나 밖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했던 노들섬을 시작으로 내가 사는 곳까지 몇 개월을 알차게 놀았다. 같은 환자이지만 보행이 불편한 나를 항상 티 안나게 배려해주고 챙겨준 언니 덕에 언니와의 시간은 늘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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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언니가 재발하게 된 것이다. 언니의 재발을 알기 전, 나는 언니에게 '재발한 사람들의 소식을 알기 무서워 블로그에 들어가기 주저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는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내게 언니의 소식을 알리기가 두려웠다고 했다. 언니가 힘들게 소식을 전한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도 언니는 강하니까, 다시 한 번 이겨내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허망하게 언니는 몇 주만에 우리를 떠났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내가 충격을 받을까봐 연락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이후 나는 언니에게 '재발의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은 걸 계속해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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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버스를 타고 노들섬을 지날 때마다, 샤로수길에서 우리가 갔던 음식점과 카페를 지날 때마다 언니가 생각난다. 내게 초록 자체였던 언니는, 녹음이 무성한 봄이 되면 유난히 진하게 생각난다. 알고 지낸 시간이 2년이 채 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선명한 기억이다.


언니는 인도를 좋아했다. 인도에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살기도 했던 언니는 인도에서 겪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언니를 보내고 나는 언니가 긴 여행에 떠났다고 생각하곤 했다. 멀리 있어서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언니는 지금 어디를 여행 중일까? 자유로운 언니가 어디든 다니며 미쳐 펼치지 못한 청춘을 즐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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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이 잔인한 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병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4년이 다 되어가는 투병 기간 동안 떠나보낸 사람들을 기억한다. 떠올리지 않아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날때마다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움 등 많은 감정이 거미줄처럼 교차한다. 그래도 요즘은 그들과 쌓았던 좋은 기억 위주로 생각하려고 한다. 내가 그들에게서 '인생의 행복한 인생 조각'을 얻었듯, 나도 그들에게 그런 조각을 선물했던 사람이길 바란다.




내가 모를 어딘가를 여행 중일 언니와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며.

유난히 언니가 생각났던 오늘, 처음으로 감정을 세상 밖으로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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