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서 혼자 살아남는 법

이거 아방가르드 하구만

by B군

인턴 생활이 끝나고 정식으로 배치된 곳은

배치된 곳은 S전자의 사내방송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8-5제 즉 8시 출근, 5시 퇴근을 할 때였고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사내의 TV에서 사내소식이 영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긴 하다 ㅎㅎ)


내가 맡은 것은 뉴스였는데

2~3분짜리 두 개 리포트를 만들고, 아나운서 녹화를 하고

사내 소식을 짧은 간추린 소식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작가도 없어서, PD가 작가였고,

편집도 직접 PD가 아날로그 편집기나 AVID 편집기로 했다.


지금이야 프리미어나 파이널 컷 같은 편집 프로그램이 대중화됐지만,

그때 우리 회사에는 AVID라는 강력한 편집기가 있었다.

보통 영화 제작에 많이 쓰는데, 프리미어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MBC 같은 지상파 방송국에나 있던 수천만 원짜리 디지털 편집기가 우리 회사엔 수십 대나 깔려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은 짬이 안 되는 나는 AVID편집을 못하게 하고 일단 1대 1 아날로그 편집기로

편집을 하면서 그림을 연습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이 조직에서 살아남을 내 유일한 무기는 AVID라고.

내 경쟁력이 될 수도 있겠다고.


공대생 출신이라 그런지, 나는 선배들과 달리 디지털 장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날부터 나만의 '비밀 수련'이 시작됐다.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 나는 매일 밤 홀로 남아 AVID 앞에 앉았다.

한글 매뉴얼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 영어 매뉴얼을 한 줄 한 줄 해석하며 기능을 익혔다.

마치 게임 퀘스트를 깨듯, 모든 버튼을 눌러보고 모든 이펙트를 적용해 봤다.

가끔 AVID로 편집한 리포트를 시사했다가 "누가 너보고 이거 쓰랬어!"라며 된통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꿋꿋했다.


이미 내 주변엔 기획도, 원고도, 촬영도 '만렙'인 베테랑 선배들이 즐비했다.

그들을 어설프게 따라 해서는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내가 파고들 틈은 '편집' 뿐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편집했다.

당시 유행하던 뮤직비디오와 광고를 프레임 단위로 분석했고,

밋밋한 뉴스 촬영본을 가져와 현란한 광고처럼 재편집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무조건, 뭐 하나라도 다르게 만든다."


사내영상이다 보니 아이템들이 반복적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기존과 다르게 노력하고 노력했다

프롤로그를 바꾸고, 엔딩을 비틀었다. 구성을 뒤엎고, 음악을 파격적으로 썼다.

자막 폰트 하나, 화면 색감 하나까지 기존의 것과 다르게 만들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직문화 관련 행사 영상을 만들어 국장님께 시사를 받았다.

영상을 말없이 지켜보던 국장님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영상이 되게 아방가르드 하네."


'아방가르드'.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혼자 웃었다.

보수적인 대기업의 심장부에서, 나는 나만의 색깔을 인정받은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지금도 너무 좋다.

나는 사실 지금도 아방기르드가 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사내영상이 아방가르드적이다.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은가! ㅎㅎㅎ


이게 내가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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