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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라 Nov 03. 2016

계속 사귀어야 할까 헤어져야 할까

불분명한 감정의 이름 찾아주기

박제말고 공유하는 당신은 센스쟁이


이별준비 기간은 괴롭다.


꽤나 많은 이들에게 이별준비 기간은 막상 이별 이후보다 괴롭기도하다. '선택'을 앞둔 시간, 갈 바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의 고통이 '확실한 비극'을 맞이했을 때보다 클 수 있다.


보통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돈다


'너무 같은 문제가 반복돼서 계속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할까'


'예전 만남을 돌이켜보거나 친구들과 이야기 해봐도 이런 문제에서 결국 해결은 이별 뿐이었다'


'그런데 당장 헤어질 생각을 하니 슬프고 머리 아프다'


'내 상황이 너무 지옥이고 당연히 헤어지면 모든게 평화라는 건 알지만 그냥 뭔가 도저히 안되겠고 자신이 없다'


등등


밑도 끝도 없고 누구도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하는(또는 줘도 못받아들이겠는) 상황일 때 소위 '이별준비'라 부를 기간이 길고 괴로워진다. 아무리 과거에 많은 데이터가 있어도 미래를 누구도 모르기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은 늘 고민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해 고통스러운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죽을 것 같은 이별의 그늘에서 내가 찾은 한 가지 방법은 바로 '감정의 이름 찾기'었다.


 

놀라운 효과, 저를 믿어보시라 



1. '해결'만큼, 어쩌면 해결보다 중요한 '이름 찾아주기'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에 <나츠메 우인장>이라는 애니가 있다. 대대손손 요괴를 볼 수 있던 소년 '나츠메'에게는 요력이 강했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우인장'이  있다. 이름 그대로 요괴들의 이름을 모아놓은 문서로 일종의 계약서 같은 것이었는데, 우인장에 이름이 실려있는 요괴는 우인장 주인의 부름에 언제든 답해야 한다. 엄청난 수의 요괴를 부릴 수 있는 이 우인장을 주변에 요괴들이 모두 탐내는 가운데, 착한 소년 나츠메는 요괴들을 이용하지 않고 우인장에 이름이 적힌 요괴들 한명 한명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종의 '성불'을 한다.


여기서 이 이름을 돌려주는 장면이 이 애니의 백미인데, 이름이 적힌 종이를 찢어 입에 물고 주문을 외우면 쨔라란-과 동시에 이름에 얽힌 요괴의 사연이 찰나처럼 지나가고 요괴는 행복한 얼굴로 사라진다.


자신의 이름을 찾은 그 자체만으로 '성불'이 되는 것

감정의 이름 찾기도 이와 비슷하다.


뭐 대단한 것을 하지 않더라도, 추상적 감정을 하나하나 떠올려 언어화 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이별의 경우 오랜 시간동안 쌓여온 긍정적 부정적 감정이 뒤엉켜있고 나만의 감정이 아닌 상대방의 감정도 얽혀있는 감정의 최극단의 상황이기에 이러한 감정의 이름 찾기 작업은 필수적이다.



2. 감정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 어떻게 해야할까


대부분은 '내 애인의 고질적 나쁜 행동을 고칠 방법' 이나 '내게 정 떨어진 애인의 마음이 내게로 돌아올 방법' '이별 뒤 내가 행복할지 여부' 만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이것에 대한 해답만 찾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문제들에서는 누구도 100%의 답을 줄 수 없기에 답답함은 끝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때 해답을 찾기 위한 달음박질을 잠시 멈추고 조용한 곳에 앉아 감정의 이름을 찾아보는 것을 먼저 해보자.


예를 들어보겠다.


상황

여기 주변 여자들을 만날 때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연락이 두절되는 L과 그의 여자친구 C가 있다. L은 최근 여자 동료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오후까지 연락이 두절됐는데, 이것을 군대 동기랑 술 마셨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거짓임이 들통났다. L은 매번 "니가 여자 친구들이랑 만나는거 싫어하니까 숨길 뿐 나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라고 말하고 C는 "처음부터 싫어한게 아니라 니가 지레 숨기고 자주 연락이 두절되니 싫은 거다. " 라는 말로 2년째 싸웠다. 현재는 서로 연락을 안하는 시기. C의 모든 친구들은 이미 L얘기 자체를 듣기 싫어하고 C도 온갖 것을 다 해봤지만 늘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L과의 관계가 잘못된걸 안다. 하지만 여전히 이별과 지속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떠올릴 때마다 답답하기만하다.


그러던 중 C는 종이에 감정을 하나하나 적어보기로 했다.  

이때 주의할 것은 좋은 애인과 관련한 사회적 기준, 친구들의 조언, 자존심, 자신의 신념, 지난 연애의 트라우마 등을 떠나 현재 C가 느끼는 것들을 실행 여부 등과 상관없이 솔직하게 적어봐야 한다는 것. 이렇게 적은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감정이름붙이기


1) '이별'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것들

- 자신을 여태 괴롭게 했던 건 L인데 자기가 사라지면 신난 L만 자유롭고 기쁠 것 같아 분하다


- L의 여자친구들 중에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억울하고 순순히 물러날 수가 없다


- 이제 L과 행복하게 잘 지낼 자신도 없고 미움만 남았지만 그렇다고 L이 다른 여자랑 행복한 꼴도 못보겠다


- L에게 상처주고 싶다. L이 후회하고 후회하며 평생 솔로로 빌빌 거렸으면 좋겠다.


- 하지만 L은 분명 바로 다른 여자친구가 생길테고 자신은 기약없는 솔로로 그걸 지켜보는 것도 싫다. 자신에게도 바로 갈아탈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 '연애'라는 선택지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것들


- L의 상습적 거짓말, 잠수 등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바뀔 수 없다.


- L은 "난 바람 피우지 않았어!" 라고 주장하지만 바람 피운 여부를 떠나 늘 그런 것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더 견딜 자신이 없다


- 자신이 너무 몰아붙여서 겁쟁이가 된 L이 스트레스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냥 믿어주고 잘해주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든다


- 하지만 이 모든 문제가 자신의 불신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란걸 이미 안다. L이 다른 건 몰라도 솔직한 사람이라 믿었던 시기에 L의 거짓말들이 튀어나왔고, L은 나쁜놈이 되기 싫어서 자신의 핑계를 댈 뿐 원래 그런자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쓴 C는 놀라움과 동시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위에 생각들은 평소에 C가 의식차원에서 잘 하지 않던 생각들이었기 때문이다.  C는 자신을 항상 착한 애인의 포지션에 뒀고 '의리' '합리' 같은 단어를 매우 좋아해서 '복수'라느니 '갈아탈 곳을 마련해두고 튀고 싶다'느니 하는 건 부질없고 무의미한 짓이라 여기며 생각도 안하려 했다. 또한평소 늘 친구들에게 "이상한 남자를 만나느니 솔로가 훨씬 편해, 왜들 그렇게 커플 되려고 안달이야 솔로가 어때서" 라고 외치던 자신이었기에 '너는 커플인데 나는 솔로인게 싫다'는 모습이 무의식에서 흉하다는 여겨왔다.


하지만 답답함이라 뭉뚱그리던 감정 하나하나를 풀어 헤쳐 만난 자신은 거대한 복수심과 혼자가 되기 싫다는 마음이 상당히 큰 분노의 화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연을 쉽게 끊지 않는 C로서 L을 좀 더 믿고 상황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난한 상처들로 인해 '이해심 많은 착한 여자친구 C'는 죽은지 오래됐던 것이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솔로가 되는게 뒤쳐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헤어짐이 두려운 이유가 L에 대한 의리, 연민, 애정이 아니라 '자신을 깔볼 L에 대한 분노' '비참해질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3. 풀어헤쳐진 감정들, 그 이후


연애 or 이별만이 존재하던 C의 머릿속에는 이제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바로 지난 연애 동안 뭉쳐지고 응축됐던 분노와 불신뢰, 원망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이를 위한 최선의 말과 행동은 무엇일지, 가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들과 마주하니 비로소 이해되는 L의 행동들도 있었다.
사실은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에 헤어지기 싫었던 것인데, 사람을 잡아두는 방법은 잘해주는 것밖에 몰랐던 C는 마음의 분노와 별개로 늘 L을 배려하고 L을 챙겼다. 그러다보니 그 배려와 챙김 속에도 불편하고 꼬인 분위기가 감돌았고, L은 꼬인 C가 마냥 미워서 더 불친절하게 굴었던 것이다.


이제 C는 정말로 헤어져야 할 이유를 알게됐다.

L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건 겉과 속 모두 꼬임 없이 밝고 친절한 C'만을 사랑하지만, 반복된 L의 거짓말로 인해 C는 더이상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무슨 결론을 내려도 두려울 것만 같았던 C는 이제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C는 확실한 감정의 타래를 정리해 혹시 까먹을까봐 종이에 적어 L과의 담판을 위해 갔다.


결론은?

마지막화에...



4. 최선의 선택은 감정에 솔직했던 자만이 알고 있다


우린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공교육 과정의 하늘 아래에서 늘 '맞는답'을 찾기 위한 고문에 시달려왔다.


'맞는답'은 늘 실체가 불분명한'사회적 합리'에 맞춰 생각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과정은 쿨하지 못함, 불필요함, 트라우마, 나쁨이라는 말 속에서 생략되곤했다.


이별 또는 사귐이라는 결론만큼이나 그 결론으로 가는 과정은 중요하며

이 과정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름을 찾지 못한 감정은 이름을 찾지 못한 요괴처럼 내 영혼의 구천을 떠돈다. 시간이 지나서 무뎌질순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 감정들은 넓디 넓은 내 영혼의 세계 도처에 숨어있다가 특정 시기에 벼락처럼 튀어나온다. 묵힐수록 더 크고 단단하게 꼬이고 뭉친채로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제때 명명하지 못한 감정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뭉치면 더더욱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매번 이별도 후회되고 사귐도 괴로웠다면 결론만이 아니라 과정 중에서 내가 진짜 원하던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어떨까. 더 나은 내일은 오늘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조용한 새벽이다.

우리 모두 종이와 펜을 꺼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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